한국화로 재탄생한 서양 명화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그림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는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그림이다. 인물의 얼굴은 스페인 왕가 초상화의 전형을 따라 세밀하게 표현하면서도 입고 있는 옷은 인상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과감한 붓터치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한 정해진 작가(40)의 ‘푸른 드레스의 지성’(사진)은 같은 대상을 그렸지만 본래 그림보다 색깔이 더 원색적이다. 호피(虎皮), 망원경, 나침반 등 원래 그림에는 없는 소품도 정 작가의 그림에 등장한다.

정 작가는 “광물성 안료를 활용하는 한국 전통 채색법인 진채법을 사용해 서양 명화를 다시 그린 것”이라며 “동양의 채색 기법을 서양화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호피는 우리 역사에서 무인의 강인함, 권력, 부를 의미했고 망원경과 나침반은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했다”며 “그림 속 인물 마르가리타는 정략결혼을 하는 등 권력에 종속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인데 각종 소품을 통해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다른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서양명화에 동양적·현대적 의미를 부여해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해온 정 작가의 개인전이 다음달 4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린다. 지난 15일 개막한 이번 전시회에서 정 작가는 서양 명화를 재창작한 작품 20점을 선보였다. 프랑수아 제라르의 ‘에로스와 프시케’를 다시 그린 ‘프시케의 균형’, 라파엘로 산치오의 ‘삼미신’을 다시 그린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다시 그린 ‘작업실의 손님들’ 등이다. 대부분 진채법으로 채색됐으며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여성의 지위를 재해석하는 상징도 있다.

심선영 갤러리그림손 디렉터는 “과거 명화 속에서는 여성이 부정적 의미로 그려지거나 역할이 위축돼 있었지만 정 작가의 그림 속에서는 독립적이며 당당한 여성으로 재해석돼 있다”며 “그림 속에서 이런 의미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을 찾아보며 감상하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