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리허설 장면.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리허설 장면.
국악은 한국 음악이기 때문에 국악작곡은 당연히 한국사람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외국 작곡가도 국악곡을 만들어 한국에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루 해리슨이 국악기를 응용한 작곡이 효시였다.

요즘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외국 작곡가의 국악곡만 모은 대형 기획공연도 등장했다. 2014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선보인 ‘리컴포즈’ 공연이 대표적이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라는 주제 아래 벨기에, 미국, 일본, 대만의 작곡가에게 국악관현악 작품을 의뢰하고 발표한 무대였다. 다음달 2일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 오르는 국립국악원 소속 창작악단의 공연도 여섯 명의 외국 작곡가와 두 명의 한국 작곡가가 만든 국악곡을 처음 연주하는 자리다. 이 공연의 객원지휘를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치용 예술감독이 맡은 것은 이들 작곡가가 주로 서양음악과 악기를 소재로 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외국 작곡가들은 국악 초보자다. 이들과 인터뷰해 보면 국악기만의 고유한 음색, 서양음악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격하게 떠는 소리 등에 매료돼 쉽지 않은 시도에 참여했다고 답한다. 그들의 국악곡을 접하는 관객의 반응도 각기 다르다. 명작은 모국어 속의 외국어를 발견하며 태어난다는 프루스트의 말을 믿는다면 그들의 작품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던 낯선 얼굴과 만나게 해준다. 반면 한국 작곡가가 더 낫지 않느냐며 ‘신토불이’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연주자는 외국 작곡가들이 한국 음악에 품는 호기심과 진지한 자세에 감동받거나 평소 낼 수 없던 소리들을 이 특별한 만남을 계기로 표현하며 자신과 악기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명작을 얻고 남기기 위한 시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건지는’ 국악작품은 절반도 안 되거나 혹은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이렇게 만난 작품 중 ‘재회’하고 싶은 작품도 있고, 작곡가가 조금 더 다듬는다면 국내외에 좋은 성과를 안겨줄 작품도 분명 있다. 하지만 지원제도 자체가 작품 초연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작품이 안착하는 데 필요한 개작과 수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나 제도는 없는 실정이다. 이 같은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첫 ‘발표’의 시간만 있지 지속적인 ‘발전’ 생태계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작품과 만날 때는 설레지만, 그 이후에는 불안하고 아쉬울 때가 많다. 국악계만의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대부분의 국제교류에는 이런 아쉬움과 한숨이 묻어 있다.

음악칼럼니스트 bstso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