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화는 과거처럼 약체통화 아니다
원·달러 환율 1100원 선이 무너졌다. 지난해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여파로 1200원 선을 넘어서며 환율 불안이 고조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올 초 ‘트럼프 효과’가 퇴조하며 원·달러 환율이 크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지난 4월 이후 지속된 달러당 1110~1150원대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면서 환율 하락 속도에 탄력이 붙고 있다.

그동안 거듭된 달러 약세에도 북핵 리스크에 밀리던 원·달러 환율의 하락 압력이 이제 분출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 등 주요국의 통화정책 정상화에 따른 부담도 국내의 견조한 경기회복에 기반한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전망으로 상쇄되고 있는 모습이다. 올해 중반 대규모로 빠져 나갔던 외국인 투자자금도 다시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올해 북핵 리스크가 불거지면서 한국에 대한 투자 신뢰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지만, 국가신용등급과 같은 대외신인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최근 한국에 대한 연례 평가를 마무리한 무디스나 S&P 등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은 한국의 신용등급을 안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주도했던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지금 한국의 경제성장은 고품질”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기업부실이나 가계부채 누증 등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대체로 한국의 전반적인 거시건전성 개선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 평가 일색이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외환위기는 물론 10년 차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도 현저히 달라진 모습이다. 핵심은 대외차입 억제, 막대한 경상흑자 등 외환부문의 건전성 개선을 기반으로 이른바 ‘신흥시장의 원죄’에서 벗어난 점이다. 이제 우리는 여느 신흥국과 동격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원화는 더 이상 과거처럼 ‘약체통화’가 아니다. 특히 한국은 2000년부터 순대외채권국으로 돌아섰고, 순대외금융자산 기준으로도 2014년부터는 흑자국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외화 기반이 생각 이상으로 풍부하고, 또 국내 외환 사정이 어려워지면 회수할 자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풍부한 외화 기반과 국내 경제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흐름을 토대로 원화가 일종의 ‘안전통화’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가 엔화나 스위스 프랑 등 전통적인 안전통화와 같은 지위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준(準)’안전통화 정도는 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국내 환율의 운동원리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환율 변동에 대한 국내 경제나 금융시장의 민감성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고환율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원화 약세로 수출을 늘리고 경상수지 흑자를 쌓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리고 원화 약세를 유도하면서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것도 위기 대비용 군자금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수출과 환율 간의 상관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진단이 늘고 있다. 환율이 오르더라도 수출이 늘어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경상흑자는 도리어 ‘불황형 흑자’를 대변할 따름이며, 3800억달러를 넘어선 외환보유액은 인위적인 환율 조작의 물증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도리어 환율 상승은 국내의 외화부채 상환 부담을 키울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최근 늘어나고 있는 순외화자산이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최근 환율 하락이 가속되면서 그 지속력이나 이해득실에 논란이 크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각종 불확실성 변수들이 산적해 있다는 점에서 환율 하락세가 마냥 지속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국내 환율의 운동원리나 속성 등을 감안할 때, 원화 약세에 편향된 우리의 인식틀 혹은 지나치게 환율에 초점을 맞춘 의사결정 논리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장보형 < KEB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