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씨의 ‘과거라는 시를 써보자 II’.
임흥순 씨의 ‘과거라는 시를 써보자 II’.
동굴 같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자 스크린 세 개가 설치된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스크린에서는 한 소녀가 깊은 산속을 헤매는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소녀는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계곡에 도달한다. 임흥순 작가(48)가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을 겪으며 굴곡진 삶을 살아온 여성 4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재구성한 영상 작품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다. 스크린이 설치된 공간은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한복이 매달린 고목, 나룻배 조형물 등이 공간 안에 설치돼 있다.

임 작가의 영상, 설치 등 작품 10점을 선보이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우리를 갈라놓는 것들_믿음, 신념, 사랑, 배신, 증오, 공포, 유령’ 전시회가 30일부터 내년 4월8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한국 중진작가 지원 사업이다. 임 작가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여성 노동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으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촉망받는 젊은 미술가에게 주는 ‘은사자상’을 받았다.

임 작가가 이번 전시회를 위해 인터뷰한 인물은 모두 일제강점기나 그 전에 태어났으며 두 명은 고인이 됐다.

임 작가의 작품은 평범한 여성의 삶이 전쟁과 폭력, 노동착취 속에서 어떻게 희생당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상영되는 방을 지나 이들이 사용한 물건을 전시한 공간을 배치한 이유다. 카세트테이프, 스웨터, 주전자 등 특별할 것 없는 물건들을 통해 평범한 삶을 희구했음을 보여준다.

임 작가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장편영화로 만들어 내년 3월 내놓을 예정이다. 입장료 4000원(서울관 통합권), 24세 이하 및 65세 이상 무료.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