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끝나지 않은 보스니아의 비극
‘사라예보의 총격’ 사건으로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비극의 땅 보스니아. 20여 년 전에는 내전으로 폐허가 됐던 곳이다. 지금도 ‘발칸의 화약고’ 중 가장 위험한 곳으로 꼽힌다. 이 나라에는 이슬람의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 정교회 건물이 혼재돼 있다. 이슬람 신자(무슬림)인 보스니아계(약 50%)와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30%),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계(15%)가 섞여 산다.

국가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북부와 남부 지역명을 합쳐 지은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무슬림+크로아티아계)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세르비아계)의 3개 권역으로 나뉘어 있다. 세 지역이 대통령을 각각 뽑고 1명씩 번갈아가며 통치한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됐을까.

역사는 15세기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은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면서 많은 무슬림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이전의 보스니아 왕국 때까지는 종교에 상관없이 하나의 보스니아인이라는 개념이 강했다. 하지만 이슬람 개종자가 자꾸 늘어났다. 이들이 지금의 보스니아인이라고 불리는 보스니악(Bosniak)이다.

나머지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정교회 신자들은 정교회 국가인 세르비아로 기울었다. 이때부터 하나의 보스니아인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오스만은 같은 무슬림을 우대하고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를 차별했다. 이는 훗날 내전(1992~1995년)으로 이어졌고, 제노사이드(종족말살)의 피바람을 불렀다.

거의 4년에 걸친 내전으로 20만 명이 죽고 230만 명이 삶터를 잃었다. 한 마을에서만 8000여 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인근 국가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민병대를 간접 지원하면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 청소’의 참상이 더해졌다.

그때의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당시 무슬림을 학살한 혐의로 재판 받던 70대 크로아티아의 전직 사령관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자 이를 거부하며 음독자살했다.

그러자 크로아티아인 사이에서 그를 ‘성스러운 순교자’로 떠받드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자칫하면 또 다른 싸움으로 번질 기세다.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증오의 역사가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