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일본 기업의 신용등급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만 해도 60%대 중반에 머무르던 A등급을 받은 기업 비율이 올해 75%까지 높아졌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재무 건전성 강화를 지상과제로 삼은 일본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내실을 다져온 결과라는 분석이다.

다만 지나치게 안전 위주의 보수적 경영 풍조가 확산되면서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한 과감한 투자에선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마른 수건 짠' 일본 기업들 75%가 신용등급 'A' 이상… 미국의 2배
‘거품 경제’ 붕괴 후 보수적 경영

24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도쿄증시 상장기업 중 등급투자정보센터(R&I)에 신용등급 정보를 게재한 450개사 가운데 75%가 주요 신용평가사로부터 ‘A’ 이상의 우량 등급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일본 기업 신용평가에서도 80%의 기업이 A등급을 받았다. 이 같은 A등급 비율은 조사 대상 기업의 약 40%만 A등급을 받은 미국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우량 기업 비율은 ‘V자’ 반등 형태를 보이고 있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A등급을 받은 기업 비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1998년 초 58%이던 A등급 비율은 1999년에는 50%로 낮아졌다. 거품 경제 당시 투자했던 부동산 및 주식 등의 자산가치가 급락하면서 기업에는 재무 안정성이 최우선 당면과제가 됐다.

이에 일본 기업들은 투자보다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며 빚 상환에 집중했다. 무차입 기업이 늘어나는 등 기업의 재무상황이 호전되면서 자연스럽게 신용등급도 올라갔다. 일본 기업의 신용등급 상승은 2012년 이후 본격화됐다. 2008~2011년 60%대 후반이던 A등급 기업 비율은 2012년 70%대로 오른 이후 계속 상승하고 있다.

‘투자 적기’ 놓치는 부작용도 속출

최근 2년간 ANA홀딩스, 도부철도, 후지전기, 미쓰비시머티리얼, 다이쿄 등 대기업들이 A등급을 회복했다. 이들 기업 중 상당수는 거품 경제 시기에 진 대규모 빚을 수십 년에 걸쳐 꾸준히 갚아나가며 신용등급을 점진적으로 올려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거품 붕괴와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거치며 은행과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공포가 커지면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실탄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도 강했다.

올 8월 A등급을 되찾은 건설업체 다이쿄는 1990년대 리조트 개발 실패로 빚이 1조엔(약 9조5250억원)이 넘었고, 2005년 오릭스그룹에 인수됐다. 이후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한 다이쿄는 부채의 세 배가 넘는 900억엔(약 8572억원)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도부철도도 부채 규모가 2012년 8500억엔(약 8조963억원)에서 2016년 8000억엔(약 7조6200억원)으로 줄었고, 지난해 7월 A등급으로 올라섰다.

일본 기업들의 A등급 비중이 높아진 것을 ‘장밋빛’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기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수익성이 개선돼 A등급을 받았다기보다는 단순히 지출을 줄여 장부상 수치가 좋아 보이게 하는 데 그친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신용등급이 오른 일본 기업의 경우 수입을 보여주는 영업 현금흐름보다 설비투자 등 지출을 나타내는 투자 현금흐름이 적은 공통점이 있다.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여주는 주가 측면에선 미국이나 유럽 기업에 비해 일본 기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보수적인 안전 위주 경영 탓에 건설회사의 경우 토지 매입 시기를 놓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며 “일단 재무 건전성은 이뤘지만 다음 목표를 찾지 못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