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이 지난 22일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열린 ‘병원중심 바이오 연구 혁신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의료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이 지난 22일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열린 ‘병원중심 바이오 연구 혁신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의료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연구중심병원을 공공연구기관으로 지정해 창업을 활성화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은 병원이 가진 아이디어를 활용해 바이오·헬스케어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이오·헬스케어산업 요람으로 불리는 병원은 대표적 규제 산업 분야로 꼽힌다. 혁신성장과 신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병원 관련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배경이다.

◆“산·병협력단 설립 허용해야”

지난 8월 기준 연구중심병원 의료진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창업한 회사는 모두 34곳에 이른다. 하지만 이 중 병원이 직접 투자해 자회사 형태로 설립된 곳은 없다. 국내 의료법은 병원이 자회사를 세울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자회사 대신 학교법인 등의 자회사를 차리려고 해도 녹록지 않다. 법인에 따라 창업 규제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들 병원 소속 의료진은 의사 개인이 책임지고 회사를 세우는 교수 창업을 주로 한다. 해외 의료진은 병원 창업을 통해 ‘헤비급’으로 몸집을 불려 싸우고 있는데 국내 의료진은 ‘플라이급’ 체급으로 이들에 맞서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보건복지부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기술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고쳐 공공연구기관에 연구중심병원을 포함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시행령이 개정되면 연구중심병원도 일반 대학처럼 산·병협력단 형태의 기술지주회사를 세울 수 있게 된다.

◆법인 따라 창업 걸림돌 제각각

국내 연구중심병원은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등 10개 대형 대학병원이 지정돼 있다. 이들은 설립 주체에 따라 재단법인 및 사회복지법인, 의료법인, 학교법인 등 다양한 형태의 법인 산하병원으로 운영된다. 재단·사회복지법인은 해당 법인이 국내 법인 지분을 5% 넘게 보유할 수 없도록 한 상속증여세법이 법인 창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의료법인은 성실공익법인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하지 않으면 자회사를 세우는 것이 금지된다. 국내 성실공익법인으로 지정된 의료기관은 두세 곳에 불과할 정도다. 이마저도 창업 가능한 사업이 해외의료수출 등으로 제한돼 있다.

학교법인 소속 병원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학교 내 산학협력단을 통해 창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어려움이 있다. 창업 기업에서 수익이 나면 병원이 아니라 학교법인에 귀속되기 때문에 병원 내 연구로 선순환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박경수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장은 “서울대병원은 특수법인이기 때문에 교육부에서 관할한다”며 “사업지주회사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적극적으로 창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규제에 갇혀있던 병원… 바이오·헬스케어 '창업 허브'로 변신 나설 듯
◆미국 등에서는 병원 창업 활발

한국과 달리 해외 의료기관들은 병원 창업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미국 메이요클리닉은 메이요클리닉 벤처스를 통해 매일 두 개 이상의 사업화 후보 기술을 접수해 이 중 25% 정도를 기술 사업화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메이요클리닉 벤처스를 통해 기술 창업한 회사는 136곳이다. 이 중 메이요클리닉 벤처스가 지분을 가진 회사는 81곳에 이른다. 기술이전 수입도 5400억원이 넘는다.

박재찬 경북대병원 생명의학연구원장은 “병원은 의사에게 가장 친한 기관이자 처음 투자할 수 있는 기관”이라며 “병원에서 투자하면 현장 필요성이 높다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고 자연히 일반 투자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병원 내 아이디어를 한곳에 모아 창업 경험이 있는 기업에 공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조명찬 충북대병원장은 “기초 원천 연구부터 바이오 분야까지 상당히 많은 연구결과물이 있다”며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외부에서 연구결과를 보고 의사에게 창업을 권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의료법을 개정해 병원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에서 이를 ‘의료 영리화’ 프레임에 가두고 있는 것이 걸림돌이다.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국내 병원은 대부분 민간 자본으로 운영되고 수익을 내지 않으면 문 닫는 구조”라며 “실체 없는 정치 논리에 성장동력이 꽉 막혀 있는 상황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