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그레이 크리스마스
가뜩이나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나는데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성탄절 연휴 첫날(23일)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더니, 이브인 어제는 하루종일 비와 안개였다. 이틀간 항공편 1100여 편이 지연·회항·결항 등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모처럼의 연휴 일정을 망친 이들이 적지 않다.

다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했건만, ‘그레이 크리스마스(gray Christmas)’가 돼버렸다. 변함 없는 것은 TV에서 종일 성탄 영화를 틀어주는 것뿐이다. 심지어 소셜미디어나 단톡방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퍼나르는 사람들도 예년에 비해 확 줄어든 듯하다. 내수경기 부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언제부터 성탄절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을까.

무엇보다 캐럴, 트리, 가로수 조명장식이 사라진 게 원인일 것이다. 12월 초부터 흔했을 것들이 안 들리고, 안 보이니 그럴 만도 하다. 서울 번화가에서조차 캐럴을 듣기 힘들다. 한 백화점이 소송을 당하면서 생긴 ‘저작권료 폭탄’ 괴담 탓이다. 올해까지 캐럴 저작권료(공연보상금)가 중소매장에는 면제되지만, 다들 지레 겁먹고 3~4년째 안 틀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성탄 특수를 기대한 유통가, 레스토랑 외에는 보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아파트 정면에서 보면 트리를 장식한 집들이 많았지만 요즘엔 이마저도 드물다. 맞벌이 가구, 1인 가구가 늘고 저출산에 따른 어린이 감소의 여파다. 트리 대신 간단한 장식소품으로 대체하는 집들이 많다. 대형마트의 성탄용품 판매가 2년째 두 자릿수 감소세라고 한다.

가로수 장식이 사라진 영향도 크다. 대로변 가로수마다 형형색색 전구가 달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살렸지만, 예산낭비 논란 끝에 2011년 중단됐다. 서울시청 앞 트리를 놓고도 특정 종교의 명절을 왜 시(市)가 기념하느냐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 밖에 젊은 층은 핼러윈, ‘OO데이’ 등 이벤트가 워낙 흔해, 굳이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할 게 없다는 반응이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무엇보다 모두들 마음이 편치 않은 탓이 크다. 작년에는 탄핵정국이었고, 올해는 유독 연말에 낚싯배 침몰, 제천 화재 등 막을 수 있는 사고가 잇따랐다. 희생자의 명복을 빌면서, 자연스레 차분하고 숙연해진 것이다. 덩달아 자선냄비까지 썰렁해져 안타깝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가장 낮은 데로 임한다’는 성탄의 의미는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차분해진 만큼,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한 배려와 나눔의 성탄절이 됐으면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