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같은 풍경·혼욕 스파에 '심쿵'… 여행이 드라마가 된다
여행사 직원인 정해라(신세경 분)는 일생 가본 적도 없는 슬로베니아의 블레드(Bled)를 열심히 고객들에게 설명하며 여행상품을 판다. 그러다 엉겁결에 해외 출장으로 진짜 슬로베니아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문수호(김래원 분)를 만난다. 그런데 사실 블레드는 정해라가 어렸을 적 나중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문수호에게 줬던 사진 속의 장소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는 문수호가 성 꼭대기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는 곳으로, 신세경이 앉아 있던 카페의 배경지로, 그리고 문수호가 묵는 숙소로 블레드 성이 여러 차례 나온다. 아름다운 블레드 호수와 성이 신비롭게 펼쳐지는데, 실제로도 블레드는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로 꼽힌다.
이곳이 아름다운 건, 알프스산맥의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호수와 1000년이 넘은 성, 그리고 호숫가 한가운데에 떠 있는 교회 등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숫가 주변으로는 이미 이 절경을 나눠가지려는 호텔이 즐비하고, 호텔의 어느 곳에서나 파란 호수와 블레드 성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착 걷었을 때 펼쳐지는 풍경은 가장 감동적이다. 해가 뜰 때 따스한 오렌지빛 햇살이 핀조명처럼 성을 비추고, 호숫가의 나무와 집들이 푸른 물 위에서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아침잠을 확 깨게 하는 압도적인 풍경이다. 이른 아침, 2시간 정도 되는 호숫가 주변을 걸어도 좋고, 더 깊은 산속의 보힌호수로 가서 보트투어를, 혹은 트레킹을 떠나도 좋다. 가을에는 호숫가를 물들이는 단풍이 예술이지만, 겨울에는 알프스 산을 따라 새하얀 설산이 가득하다.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려는 젊은이들이 겨울마다 블레드에 모이는 이유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숙소로 등장하는 곳은 130m 절벽 위에 서 있는 블레드 성이다. 사실 이곳 외에 다른 도시의 명소 두 군데가 더 숙소로 등장하는데, 마치 한 공간처럼 세 곳이 짜깁기한 것이다. 블레드 성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성이다. 지금도 중세풍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 박물관이 있다.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박물관은 오래된 문마다 열고 들어가면 중세시대의 인쇄소를 재현해놓은 구텐베르크 인쇄소, 대장간, 와이너리 등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중세 시대의 옷을 입은 수도사가 등장하고, 소매가 부풀어 있는 흰 웃옷을 입은 인쇄소 청년도 일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이곳에 사는 중세 사람들처럼 혹은 연기자들처럼 성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와인이나 수작업으로 만든 기념품도 판다.
스파산업의 중심지, 믹스 사우나도 이채
블레드에서 손꼽히는 명소 중에는 호숫가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의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고대 슬라브에서 생명과 풍요의 여신인 지바(Ziva)의 신전이 세워져 있던 섬으로, 이후 성모승천교회가 세워졌다. 섬까지는 플레타나(Plenana)라 불리는 전통 나룻배를 타고 간다.
이 배를 모는 뱃사공들은 이어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몇 명 남지 않아 자부심도 대단하다. 블레드 섬은 슬로베니아인에게 꿈의 결혼식 장소로도 통한다. 교회까지 올라가는 99개의 계단을 신랑이 신부를 안고 올라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 안은 경건하고, 안에 길게 내려진 줄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저 줄을 힘껏 잡아당겨서 종을 세 번 치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집니다. 근데 꼭 한 가지만 비셔야 해요.”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우리도 한 가지씩 소원을 빌었다. 줄이 생각보다 무거워 종을 치기가 정말 힘들다. 너무 힘을 주다 보니 소원마저 까먹을 것 같았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종을 쳤다.
지금 나와 있는 슬로베니아의 여행 상품에서 블레드는 당일치기로 왔다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보니, 하루로는 모자랐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최소한 하룻밤 이상은 자고 가야 한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블레드는 휴식과 힐링을 위한 자연 휴양지로 오래전부터 각광받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19세기 중반 이곳에 요양을 하기 위해 온 아널드 리클리(Arnold Rikli)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원래 스위스 출신으로 이곳에서 나는 자연 온천수가 효능이 좋다는 걸 알고, 이곳의 좋은 물과 공기, 햇살을 이용한 치유법을 개발한다. 자신의 병이 나은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그는 블레드에 자연 치유 요양소를 차린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당시 아편과 마약에 찌든 부호들도 이 도시에 치료 차 찾아오면서 점점 더 입소문이 났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 찾아오면서 블레드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온천 휴양지가 됐다. 그때부터 스파산업이 번성한 블레드는 지금도 호텔마다 스파와 사우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22도의 자연 온천수를 스파로 쓰는 명성 높은 호텔도 있고, 워터파크 같은 현대적인 시설과 수영장, 사우나를 자랑하는 모던한 곳도 있다. 블레드 골프 호텔은 블레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영장과 사우나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경험한 사우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발가벗고 들어가는 사우나 안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들어가는 ‘믹스 사우나’였기 때문이어서다. 이런 믹스 사우나의 경우 대개 나이 많은 어르신이 많은데, 젊은 커플이 많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유럽에서 스파를 다닐 만큼 다녀본 필자에게도 블레드 스파는 놀라운 곳이었음을 고백한다. 한국처럼 탕이 많지 않고, 핀란드식, 터키식, 아로마식으로 사우나룸이 잘 돼있는 점도 다르다. 흥미진진한 스파를 즐겨보고 싶다면, 블레드 골프 호텔이 제격이겠다. 담당자는 효과적인 사우나 방법을 알려줬다. 습기가 가득 찬 터키식 사우나에서 몇 분간 땀을 내고 샤워로 씻어낸 다음, 다시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내고 씻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샤워하는 공간도 공용이며, 문도 달려 있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시길.
포스토니아의 절벽에 세워진 희귀한 동굴 성
드라마에는 성공한 사업가 문수호가 1년에 한 번씩 들른다는 슬로베니아의 숙소가 나온다. 그 숙소의 외관은 블레드 성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길은 오토섹 성의 입구에서, 그리고 숙소의 내부는 포스토니아의 동굴 성에서 찍었다. 세 장소가 모두 다른 도시에 있고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다. 블레드 성은 슬로베니아의 북서쪽에, 동굴성은 남서쪽에, 오토섹 성은 동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숙소의 내부로 등장한 곳은 가파른 절벽 속에 있는 천연동굴을 성으로 만든 프레드야마(Predjama)다. 800년 전에 지어진 고성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특히 아름다운데 슬로베니아에서 손꼽히는 사진 명소다. 이 성을 배경으로 김래원도 신세경의 얼굴을 열심히 찍는 신이 나온다. “나도 저기서 찍었는데!” 슬로베니아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꽤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슬로베니아에서는 꼭 들러가는 여행지다. 프레드야마 성에 담긴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성에는 슬로베니아의 로빈후드라 불리는 영웅, 에라젬 프레자마스키가 자신을 죽이려던 왕을 피해 숨어 살았다. 워낙 가파른 곳에 지어진 성이고 쉽게 쳐들어오기가 쉽지 않아 프레자마스키는 이곳에서 1년을 넘게 버텼지만, 하인의 배신으로 화장실에서 돌포탄에 맞아 죽는다. 성 안에는 당시 돌포탄으로 쓰였던 커다란 돌덩이들이 놓여 있는가 하면, 함께 살았던 사람들(당시 30여 명이 함께 성 안에서 살았다)의 공간도 재현돼 있다. 성직자가 기도를 드리던 예배당, 프레자마스키의 침실, 하녀가 일하던 부엌 등등. 계단을 따라 성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동굴과 이어진다. 동굴 쪽까지 올라가면 절벽 사이로 사진 프레임에 짜맞춘 듯 마을 풍경이 펼쳐지는데, 이 장면이 또 한없이 멋지다.
프레드야마 성과 함께 포스토니아에서 꼭 가봐야 할 동굴이 또 한 군데 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긴 포스토니아 동굴이다. 총 길이 24㎞, 1817년에 발견돼 1818년부터 개방됐다. 내년에는 성대한 200주년 파티도 열릴 것이다. 동굴이 생긴 지는 200만 년이나 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달려 있는 종유석과 석순을 보고 알 수 있다. 석순이 10㎝ 자라려면 최소 1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쳐다봐도 그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저 자연의 신비로움을 서늘한 어둠 속에서 온몸으로 느낄 뿐이다. 동굴 안에서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구간은 총 5㎞ 정도 된다. 이 중 2㎞는 전기 기차를 타고 들어가고, 1.5㎞ 정도를 걸은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나온다. 숨겨진 온천 마을, 돌렌스케 토플리체
마지막으로 소개할 배경지는 크르카(Krka) 강의 작은 섬 위에 있는 오토섹(Otocec) 성이다. 1252년에 지어진 이 고성은 슬로베니아에서 물로 둘러싸인 단 하나의 성이다. 슬로베니아의 성들은 모두 언덕 위나 도심 안에 자리한 때문이다. 오토섹 성은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고딕양식까지 세월이 변하며 덧입혀진 건축이 특히 아름답다.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들어가는 숙소의 입구로 잠깐 등장한다. 하지만 장면이 나올 때 나는 단번에 그곳이 오토섹 성임을 알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암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입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고성은 현재는 부티크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성이 워낙 아름답고 섬 주변이 자연적이라, 이곳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투어까지 만들어져 있다. 운좋게 우리도 이곳 오토섹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점심 식사를 하고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음 여정지는 이 성에서 멀지 않은 돌렌스케 토플리체(Dolenjske Toplice) 지역이다. 13세기에 발견된 온천수가 나오는 마을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슬로베니아에서는 역사적인 온천 휴양지로 잘 알려진 곳.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전문적인 치료와 요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노년을 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스파 시설과 웰빙 프로그램도 매우 체계적이다. 이 때문에 블레드에 비해서는 확실히 젊은 사람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돌렌스케 토플리체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와 매우 가깝다. 주변 나라를 여행하다 쉽게 넘어올 수도 있는 곳이다. 자그레브를 여행하고 잠은 상대적으로 호텔비가 저렴한 이곳으로 넘어와 자는 동유럽 상품도 많이 있다. 하지만 잠만 자고 가기에 이곳은 너무 억울한 여행지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지 않으려면, 이 미지의 도시에 시간을 남겨두라. 가까운 와이너리에서 슬로베니아의 유명 와인도 마시고, 좋은 온천수가 나오는 발네아 웰빙센터에서 여행의 피로도 풀 수 있다.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여행지를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 실은 이 기분을 슬로베니아 여행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여행정보
류블랴나까지 가는 직항편은 아직 없다. 여러 항공사의 경유편을 이용해 갈 수 있다.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터키항공을 이용하면 비행시간만 약 14시간 정도 걸린다. 터키항공은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매일(TK091) 오후 12시40분 출발하고, 금~월요일(TK089)에는 오후 11시20분 출발편이 한 편 더 있다. 이스탄불에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까지 가는 항공편은 매일 한 편씩 있고, 월, 금, 토요일에는 두 편 운항한다.
블레드=글·사진 이동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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