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정부가 주도해 설립한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가 한 푼도 사용되지 않은 채 31일 사라진다. 기업 구조조정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던 정부 시도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은 28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올해 말 만료 예정인 자본확충펀드 연장안을 별도로 논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본확충펀드는 올해 말 자동폐지된다.

자본확충펀드는 조선·해운 등 기업 구조조정에 자금을 투입한 국책은행의 자본건전성이 나빠질 가능성에 대비해 도입됐다. 작년 4월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 국책은행에 직접 출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공약하면서다.

한은은 중앙은행의 기본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논란이 계속되자 이후 직접 출자 대신 ‘대출 방식’으로 방법을 바꿔 자본확충펀드를 도입했다. 한은은 다만 자본확충펀드에 시중금리보다 높은 대출금리를 적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금통위원들도 대출 심사를 까다롭게 했다. 도입 이후 대출 실적이 전무한 이유다.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기업 구조조정 정책이 바뀐 것도 자본확충펀드 폐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당국은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한은 발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금융권과 시장 자율에 맡기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