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춘기 까까머리 중2 때. 그건 운명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숱한 밤을 함께 지샜죠. 그래도 전혀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빛바랜 앨범처럼 기억 한 켠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름은 ‘삼중당문고’입니다. 만화방 졸업 후 제 돈 주고 산 첫 책이었죠. 1975년 초판본 200원. 당시 짜장면 값이었습니다. 용돈만 모이면 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고교 졸업 때는 약 100권을 모았습니다. 바래고, 헐어도 이사 때마다 꼭 챙겼는데…. 마흔에 끝내 이별했습니다.

삼중당문고는 500종, 250만 권이 팔렸답니다. 지금도 온라인장터에 가끔 눈에 띕니다. 낡디낡은 초판본이 무려 10만~20만원이랍니다. 그 시절 추억의 값어치겠죠.

동물원 노랫말처럼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이럴 때는 영화가 제격입니다. 먼저 ‘미나문방구’를 권합니다. 간판의 ‘문’자가 떨어져 주인공 미나가 ‘미나 방구’로 놀림감이 됐던, 달고나 같은 얘기죠. ‘시네마천국’에서 극장이 헐리던 날 모두 눈물짓던 장면은 또 보고 싶네요. 반복된 일상을 시(詩)처럼 보여준 ‘패터슨’은 짐 자무시의 연말 선물입니다.

1976년 개관한 정동 세실극장이 내년 1월8일 폐관한다네요. 연중무휴로 공연해도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서랍니다. 김중업 설계작품이라 아쉬움이 크죠. 그러고 보니 삼일로창고극장, 대학로극장, 상상아트홀 등이 2년 전 한꺼번에 문을 닫았습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은 점점 빈곤해지는 듯합니다.

사법시험도 54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무수한 애환이 쌓인 신림동 고시촌 풍경이 많이 달라지고 있답니다. 녹두거리에 창업공간, 갤러리, 소극장 등이 들어섰답니다. 한편으론 변시(변호사시험)족이 다시 채우고 있죠.

사람과의 이별은 늘 힘듭니다. 든든하게 기댔던 선배들의 빈자리가 뻥 뚫린 느낌이네요. 회사 앞 중국집도 문을 닫았습니다. 주인 겸 주방장의 짜장면, 탕수육이 일품이었는데. 반면 주변 성요셉아파트, 서소문아파트 등은 40년 넘도록 건재합니다. 개발연대판 주상복합이죠. 낡은 거리, 철길 등의 정취로 요즘 뜨는 핫플레이스라니 반갑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진짜 사라져야 할 것은 안전불감·안보불감증인데. 새해에는 미움과 반목, 갈등과 싸움도 모두 사라졌으면 합니다. 미세먼지도. 올 한 해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