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고도 긴 여행지로 당신은 어디를 택할 것인가.
배우 안재욱은 뮤지컬 '광화문연가'에서 임종을 눈앞에 두고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 중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중년의 명우 역할을 맡았다.
명우는 과거로 자신을 안내하는 월하의 도움으로 1980년대 광화문 시위가 벌어지던 날로 돌아가 사랑하는 수아가 백골단에 폭행당하고 연행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아파한다.
환상과 기억, 현실이 교차하는 미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상처와 그리움의 실체와 맞딱뜨리게 된다는 이야기.
안재욱에게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또한 지난 2013년 지주막하출혈로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던 일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지주막하출혈은 뇌표면의 동맥으로부터, 지주막과 유막(柔膜) 사이에 있는 지주막하강(뇌척수액이 흐르고 있는 부위)에서 뇌압이 상승하며 생긴 출혈이 발생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스타로서 1세대 한류스타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그에게 이번 '광화문연가'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다. 생과 사의 고비를 지나쳐 온 뒤 결혼을 하고 귀여운 딸까지 둔 가장이 된 안재욱이 마지막 순간 한가지 기억만을 가져가야 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안재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들로 아내와의 사랑이 이루어진 날, 데뷔 순간, 대학에서 연극하던 시절, 첫 아이 수현이가 태어난 때, 가수로서 해외에서 콘서트 하던 순간, 미국에서 사고가 난 일 등을 꼽았다.
임종을 앞두고 한 가지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이중 어떤 기억부터 지워야 할까.
안재욱은 첫 번째 지울 기억으로 한류스타로서 인기를 누렸던 시절을 선택했다.
두 번째로 지운 기억은 연기자로 데뷔한 시절이었다. 세 번째로 지운 기억은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다니며 연극을 배웠던 날들이었다.
네 번째로 안재욱은 미국에서 지주막하출혈로 뇌수술을 받았던 기억을 지웠다. 그는 "힘들었지만 삶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해 준 기억이다"고 당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다. 당시 그를 간병했던 안재욱의 동생 안재현은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안재욱은 자신의 모든 소중한 순간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남길 기억으로 소중한 아내에게 프로포즈한 그 때를 선택했다.
안재욱은 지주막하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던 당시에 대해 "드라마에서는 마지막 순간 마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 뇌출혈을 겪어보니 영화 필름 통을 툭 놓쳤을 때 필름들이 순식간에 풀어지는 것처럼 빠르게 모든 기억이 지나쳐 갔다"고 회상했다.
안재욱의 경험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는 뮤지컬 '광화문연가'를 통해 관객들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깊은 밤을 날아서', '소녀', '그녀의 웃음소리뿐', '슬픈 사랑의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 '옛사랑', '기억이란 사랑보다', '광화문 연가' 등이 한 남자의 삶에 녹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광화문연가'는 회한으로 가득 찼던 명우의 시간들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로 다시 써내려가 현재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뮤지컬 '광화문연가'는 중년 명우 역에 안재욱, 이건명, 이경준, 젊은 명우 역에 허도영, 김성규, 박강현의 매력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도 선사한다. 중년 수아 역에 이연경, 임강희, 첫사랑 젊은 수아 역에 홍은주, 린지, 시영 역에 유미, 이하나, 중년 중곤 역에 박성훈, 젊은 중곤 역에 김범준이 출연해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소중하게 기억될 사랑. 생과사 갈림길에 섰던 안재욱의 명연기가 녹아 있는 '광화문연가'는 우리가 치열한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잠시 잊고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깨닫게 해준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픈' 나만의 추억속으로 떠나보는 '광화문연가'를 통해 안재욱의 진심을 만나보자.
공연장 밖을 나서면서 내 인생에 1분이 남았다면 무엇을 추억하고 어떤 기억을 안고 떠나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한편, CJ E&M과 서울시뮤지컬단이 최초로 공동 제작한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오는 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