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현대 경비원 해고사태, 성북구 주민들은 어떻게 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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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의 소수의견]
성북구 모의시민회의 의장 맡은 김의영 서울대 교수 인터뷰
"해고 없이 휴게시간 보장, 근로시간 단축해 입주민 부담↓"
주민 80명 숙의해 권고안 도출… '풀뿌리자치 롤모델' 될 만
성북구 모의시민회의 의장 맡은 김의영 서울대 교수 인터뷰
"해고 없이 휴게시간 보장, 근로시간 단축해 입주민 부담↓"
주민 80명 숙의해 권고안 도출… '풀뿌리자치 롤모델' 될 만
결국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이 전원 해고됐다. 법원은 경비원들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상대로 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발단은 최저임금 인상, 압구정 현대는 대표적 부촌이다. 끝내 “같이 살자”며 내민 손은 없었다. “있는 사람이 더하다” 싶은 민낯만 남았다.
반론의 여지가 있다. 도덕적 비판과 별개로, 그들은 합목적적 결정을 내렸다. ‘최저임금의 역설’이다. 물론 다른 결정을 내린 아파트도 보인다. 입주민들이 경비원 최저임금 인상분을 나눠 부담한 경우다. “커피 한 잔 덜 먹으면 된다”고 했다. 훈훈하다. 다만 이런 의문이 남았다. 아파트 경비원 일자리는 주민의 ‘선의’가 전제돼야만 유지되는 것일까. 제도적 해법은 없을까.
시간과 장소를 옮겨서. 지난해 12월16일 성북구 주민자치회의실에서 ‘모의 시민회의’라는 작은 실험이 진행됐다. 의제는 다름 아닌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 압구정 현대와 똑같은 문제였다. 구민 80명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우선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경비원이 나와 각자 입장을 설명했다. 정리해고, 정부 지원 받기, 제3의 대안…. 회의 초반 주민들 의견이 엇갈렸다. 쉽게 결론 날 사안이 아니었다. 경비원 최저임금을 보장하면서 정부 지원 받는 방법이 주민들 관심사였다. 종일 토론에 들어갔다. 다시 고용노동부·민주노총·시민단체 인사가 나섰다. 정부 논리와 지원방안, 현실적 애로점, 참고사례가 제시됐다. 주민들은 경청 후 모둠토론을 거듭했다. 중간 중간 그때껏 나온 얘기가 정리돼 회의실 화면에 떴다. 의견 변화와 흐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숙의(熟議)였고 오롯이 자치였다. 꼬박 하루 만에 최종권고안이 나왔다. “해고는 없다. 대신 근로시간을 단축한다. 경비원 휴게시간은 철저히 지킨다.”
근무형태를 조정해 경비원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론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주민 부담을 줄이는 결론을 도출했다.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논의와 조율을 거쳐 나름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 회의를 제안하고 의장까지 맡은 사람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사진)다. 그는 성북구의 아파트에 산다. 자치를 다룬 고전 《미국의 민주주의》 저자 토크빌을 즐겨 인용하는 정치학자다. 지난 31일 성북구 한 카페에서 김 교수를 만나 그날의 전모를 캐물었다.
- 모의 시민회의, 어떻게 열린 건가.
“작년 초부터 성북구와 시민단체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주민회의를 준비해왔다. 첫 번째 회의를 한 뒤 마침 두 번째 회의 주제가 비어있었다. 제가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장 직면한 삶의 문제 아닌가. 풀뿌리 자치에 적합한 주제다 싶더라. 김영배 구청장과 곽노현 이사장이 호응해 성사됐다.”
- 규모·기간·방식 차이는 있지만 원전 공론화위원회 모델이 연상된다.
“원전 공론화위는 큰 문제를 원샷으로 풀어낸 모델이다. 공론조사 방식이었다. 모의 시민회의와는 차이가 있다. 사안의 성격이 달라서다. 찬반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이 알맞다고 봤다.”
- 포인트를 짚어 설명해달라. 참여 주민 80명은 어떻게 선정했나.
“처음 시도하는 거라 80명 모으기가 쉽진 않았다. 다행히 성북구 주민참여예산 등에 들어오는 기존 주민 풀(pool)이 있더라. 마을시민교육센터, 평생학습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주민에게도 홍보했다. 평소 자치에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다. 성별, 연령, 성북구 내 동 단위 분포 등 가능한 대표성을 감안해 배분했다.”
- 이해당사자도 회의에 들어왔는데.
“중요한 이슈였다. 원전 공론화위의 경우 이해당사자(한국수력원자력)가 빠졌지 않나. 아파트 경비원 고용 문제는 입주민 의견이 필요하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시민회의가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 그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
“맨 처음에 참석 주민들을 조사했다.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경비원부터 각자 입장을 얘기했다. 큰 얼개를 파악한 주민들끼리 모둠토론을 벌였다. 중간조사도 실시했다. 그러고 나서 전문가들이 나섰다. 고용부 공무원이 정책을 설명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그에 따른 노동자 1인당 월13만원의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등등. 민주노총 관계자는 최저임금 인상 필요성 위주로 얘기했고. 노년의 경비원이 실직했을 때 들어가는 사회보장비용이 더 크다는 게 골자였다. 마지막이 시민단체 분이었는데 아주 인상 깊었다.”
- 어떤 점이?
“입주자 대표 경력이 있더라. 자신이 실제로 겪어본 터라 사례가 생생했다. 관리비 내역을 뜯어보니 경비원 임금보다 전기비 비중이 높았다고 한다. 아파트단지 내 조명을 LED(발광다이오드)등으로 교체해 아낀 돈으로 경비원 임금을 보전했다고. 어느 부분을 풀어야 할지 정확히 본 거다. 판을 깔아주니 주민들의 속속들이 깨알 같은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일요일은 경비원 쉬게 해주자, 4명 근무가 3명으로 줄어도 감수하겠느냐, 택배도 안 오는 날이니 괜찮을 것 같다, 꼼수 쓰지 말고 진짜 쉬게 하면서 최저임금 보장하는 쪽으로 가자….”
- 현실을 느끼고 애로점도 알고 양보해가면서. 각자 입장만 내세우는 구도에선 섞일 수 없었던 것들이 섞이기 시작하는 거구나.
“지금 정부에게 최저임금 인상은 당위다. 대신 일자리 안정자금 13만원을 준다. 채찍과 당근이다. 시장의 대응이 뒤따른다. 경비원 자르고 간접고용으로 바꿔 용역 준다든지, 기계 도입하거나 차라리 젊은 경비원 뽑는다든지. 간극이 뚜렷하다. 시민회의는 여기에 자치의 논리를 들여왔다. 정부나 시장 논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양보·조정·약속하는 방식이다. 돈을 많이 받기(최저임금 인상)보다 오래 일하고 싶다(고용안정)는 경비원 목소리도, 관리비 인상은 부담되지만 생활상의 다소간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주민 목소리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게 과정을 만들어가며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한다. 이 의미가 크다.”
- ‘과정’과 ‘경험’. 정부 방침대로 시행하는 것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 아닌가.
“질의응답과 모둠토론의 ‘숙의 세트’를 3차례 거쳤다. 그러면서 모인 의견을 정리해 화면에 실시간으로 띄웠다. 변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니 지루할 새가 없다. 스스로 참여해 바꾼다는 효능감도 피부로 느낀다. 굉장한 교육 효과다.”
- 구청은 권고안을 그대로 이행해야 하나.
“권고안에 강제력은 없지만 이행하리라 본다. 구청장도 의지를 보였다.”
- 성북구에 서울지역 아파트 경비원의 약 40%가 몰려있는 걸로 안다. 다른 자치구나 개별 아파트에도 좋은 선례가 될 듯한데.
“의미 있는 참고사례가 됐으면 한다. 정부가 거시적 수준의 얘기만 하면 이런 미시 단위까지 제대로 안 내려온다.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굴절’이 일어나는 이유다. 작지만 좋은 실천사례는 없는지, 그걸 어떻게 유형화할지 세세하게 점검·발굴하는 노력이 같이 가야 한다. 장은 마련하되 중앙정부가 일일이 다 할 수 없으므로 기초단체 역할이 중요해진다.”
- 압구정 현대 경비원 집단 해고가 논란이 됐다. 도덕적·윤리적 비판을 받는데 어떤 측면에선 합목적적 판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파트 주민들의 선의에만 기대기엔 ‘공백’이 있는 것 같고. 해서 모의 시민회의 모델이 흥미롭다.
“제도화가 핵심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단위에서 자치의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모의 시민회의나 동별 주민총회를 열어 예산 문제를 다루는 것도 그 한 형태고. 꼭 회의 방식이 아니라도 비공식적 관습과 규범을 만들어가는 것 역시 넓은 의미의 제도다.”
- 일단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선거부터 제대로 하자는 얘기로 들린다.
“아파트단지 하나에 4000~5000세대씩 산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분명 안에서 분출되는 요구가 있다. 그 수요를 반영하는 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안다, 그런 데까지 관심 가질 여유가 별로 없다는 거. 그러는 사이에 회장 하던 사람이 계속 한다. 부정과 비리의 여지가 생긴다. 계속 연임 못하도록 정부가 규정을 만들었다. 어떻게 됐는지 아나. 패거리를 만들어 실세는 뒤로 빠지고 자기네끼리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는다. 이런 작은 것부터 바꿔야 한다.”
- 작지만 직접 바꾸는 경험의 축적.
“앞에 얘기한 사례 있지 않나. LED등으로 교체해 아낀 돈으로 아파트 관리비 충당한 케이스. 그런 분이 ‘숨은 시민 영웅’이다. 노력을 통해 실제로 관리비가 내려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입주민대표회의에 관심도 갖고 참여해 뭔가 해보려 하겠지. 그게 바로 정치 아닌가?”
아파트 경비원 해고 사태, 모의 시민회의 모델을 물어보며 시작한 인터뷰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자치’로 넘어갔다.
- 결국 자치의 문제다. 토크빌적 의미인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인은 관료를 찾아가고 영국인은 지주에게 간청하는데 미국인은 모이더라, 그래서 별 시시콜콜한 결사체까지 만들어 해결책을 찾더라는 거지. 토크빌이 ‘시민참여의 예술(art of association)’이라 표현했다. 풀뿌리 차원 기초체력을 다져 민주주의가 굴러가도록 만드는 게 선진모델이다.”
- 이른바 동네 민주주의, 주민자치의 필요성이다.
“독일이 왜 축구를 잘하나. 동네 축구부터 잘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다. ‘보충성의 원칙’(주민과 밀접한 사무는 기초단체, 기초단체가 처리하기 어려운 사무는 광역단체, 광역단체가 처리하기 어려운 사무는 정부 사무로 배분)이란 게 있다. 가급적 작은 단위에서 해결하되 잘 안 될 때 올려보내는 방식이 돼야 한다. 위에서 내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일자리 안정자금 13만원씩 준다는데도 신청이 저조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잖나. 정치학자 중에서도 최장집 교수 같은 분은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을 중시하는데.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다. 직접과 대의민주주의는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제가 얘기하려는 건 이거다. 정치를 청와대와 여의도로만 한정하지 말자. 제왕적 대통령제 한 방에 고치는 개헌 중요한데, 그 수평적 분권(삼권분립)을 받쳐주는 수직적 분권(주민자치)도 같이 가자.”
- 촛불로 대변되는 광장민주주의와의 변별점은 제도화에 있다고 보면 될까.
“저 ‘식견 있는 비판적 시민’들의 분출하는 요구를 어떻게 받아 해결할 것인가. 밑으로부터의 협치가 시대정신이라 본다. 촛불 들고 광화문만 나간 게 아니다. 각 영역의 요구들이 쏟아진다. 이제 동네와 직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기존 위계(hierarchy)가 무너진다. 촛불은 자치다.” - 이를테면 서지현 검사 같은….
“정치란 기본적으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개인이 각 영역에서 촛불을 드는 ‘미투 현상’은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분권’이다. 새로운 요구를 가진 시민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분권형 개헌, 민주시민교육, 두 가지를 큰 축으로 정교하게 제도를 만들면서 우수모델과 사례를 실험·발굴·전파하는 게 중요하다.”
- 지방분권이 개헌의 화두가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긴 한데.
“표현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중앙정부의 권력을 지방으로 나눠준다는 뉘앙스라.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맞다. 아까 말한 보충성의 원칙이 그거다. 물론 간단하지는 않다. 분권은 혼란을 수반한다. 님비(NIMBY), 담합 같은 현상도 생길 수 있고. 단박에 잘 안 될 거다. 이런 우려에 답하자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풀뿌리 단계에서만 100% 하자는 것도 아니다. 대체가 아니라 보완이다. 무엇보다 시대가 변했다.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 분권, 좋은데 지역간 격차 문제는 어떻게 하나.
“빈익빈 부익부 우려가 있다. 그래서 분권과 지방균형이 같이 갈 필요가 있다.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강남구 독립’ 얘기가 나왔지 않느냐(웃음). 그런 다툼이 왜 없겠나. 하다못해 구 예산 정할 때도 우리 동네에 놀이터 짓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시민들이 이해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
-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도 그런 얘기를 했다. 강남구 세금을 걷어 서울시 전체가 나눠 쓰는 사례를 들기도 하더라.
“분권을 하면 지역간 격차로 인해 균형발전과 상충된다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에 중앙정부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은 교부금 제도로 나눠주고 있는데, 이걸 풀어주면서 잘 조정해야 한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 거지.”
- 시민사회 자율성을 키우면서 정부는 조정자가 되는 상을 그리는 것인가.
“영국 캐머런 정부가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를 내세웠다. 정부가 아니라 공동체사회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구의회, 시의회도 더 활발히 견제·감시해야 한다. 자치뿐 아니라 하위 단계 대의제까지 더 충실하게 구현하는 형태다. 수직과 수평 두 축을 촘촘하고 다층적으로 채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최근 한국정치학회장에 취임했다. 청와대와 여의도, 큰 정치부터 우선시하라는 주변 조언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 교수는 동네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풀뿌리 자치가 정치의 근간이 돼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김봉구의 소수의견]은 통념이나 대세와 거리가 있더라도 일리 있는 주장, 되새겨볼 만한 의견을 소개하는 기획인터뷰입니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작은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
반론의 여지가 있다. 도덕적 비판과 별개로, 그들은 합목적적 결정을 내렸다. ‘최저임금의 역설’이다. 물론 다른 결정을 내린 아파트도 보인다. 입주민들이 경비원 최저임금 인상분을 나눠 부담한 경우다. “커피 한 잔 덜 먹으면 된다”고 했다. 훈훈하다. 다만 이런 의문이 남았다. 아파트 경비원 일자리는 주민의 ‘선의’가 전제돼야만 유지되는 것일까. 제도적 해법은 없을까.
시간과 장소를 옮겨서. 지난해 12월16일 성북구 주민자치회의실에서 ‘모의 시민회의’라는 작은 실험이 진행됐다. 의제는 다름 아닌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 압구정 현대와 똑같은 문제였다. 구민 80명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우선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경비원이 나와 각자 입장을 설명했다. 정리해고, 정부 지원 받기, 제3의 대안…. 회의 초반 주민들 의견이 엇갈렸다. 쉽게 결론 날 사안이 아니었다. 경비원 최저임금을 보장하면서 정부 지원 받는 방법이 주민들 관심사였다. 종일 토론에 들어갔다. 다시 고용노동부·민주노총·시민단체 인사가 나섰다. 정부 논리와 지원방안, 현실적 애로점, 참고사례가 제시됐다. 주민들은 경청 후 모둠토론을 거듭했다. 중간 중간 그때껏 나온 얘기가 정리돼 회의실 화면에 떴다. 의견 변화와 흐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숙의(熟議)였고 오롯이 자치였다. 꼬박 하루 만에 최종권고안이 나왔다. “해고는 없다. 대신 근로시간을 단축한다. 경비원 휴게시간은 철저히 지킨다.”
근무형태를 조정해 경비원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론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주민 부담을 줄이는 결론을 도출했다.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논의와 조율을 거쳐 나름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 회의를 제안하고 의장까지 맡은 사람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사진)다. 그는 성북구의 아파트에 산다. 자치를 다룬 고전 《미국의 민주주의》 저자 토크빌을 즐겨 인용하는 정치학자다. 지난 31일 성북구 한 카페에서 김 교수를 만나 그날의 전모를 캐물었다.
- 모의 시민회의, 어떻게 열린 건가.
“작년 초부터 성북구와 시민단체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주민회의를 준비해왔다. 첫 번째 회의를 한 뒤 마침 두 번째 회의 주제가 비어있었다. 제가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장 직면한 삶의 문제 아닌가. 풀뿌리 자치에 적합한 주제다 싶더라. 김영배 구청장과 곽노현 이사장이 호응해 성사됐다.”
- 규모·기간·방식 차이는 있지만 원전 공론화위원회 모델이 연상된다.
“원전 공론화위는 큰 문제를 원샷으로 풀어낸 모델이다. 공론조사 방식이었다. 모의 시민회의와는 차이가 있다. 사안의 성격이 달라서다. 찬반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이 알맞다고 봤다.”
- 포인트를 짚어 설명해달라. 참여 주민 80명은 어떻게 선정했나.
“처음 시도하는 거라 80명 모으기가 쉽진 않았다. 다행히 성북구 주민참여예산 등에 들어오는 기존 주민 풀(pool)이 있더라. 마을시민교육센터, 평생학습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주민에게도 홍보했다. 평소 자치에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다. 성별, 연령, 성북구 내 동 단위 분포 등 가능한 대표성을 감안해 배분했다.”
- 이해당사자도 회의에 들어왔는데.
“중요한 이슈였다. 원전 공론화위의 경우 이해당사자(한국수력원자력)가 빠졌지 않나. 아파트 경비원 고용 문제는 입주민 의견이 필요하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시민회의가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 그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
“맨 처음에 참석 주민들을 조사했다.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경비원부터 각자 입장을 얘기했다. 큰 얼개를 파악한 주민들끼리 모둠토론을 벌였다. 중간조사도 실시했다. 그러고 나서 전문가들이 나섰다. 고용부 공무원이 정책을 설명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그에 따른 노동자 1인당 월13만원의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등등. 민주노총 관계자는 최저임금 인상 필요성 위주로 얘기했고. 노년의 경비원이 실직했을 때 들어가는 사회보장비용이 더 크다는 게 골자였다. 마지막이 시민단체 분이었는데 아주 인상 깊었다.”
- 어떤 점이?
“입주자 대표 경력이 있더라. 자신이 실제로 겪어본 터라 사례가 생생했다. 관리비 내역을 뜯어보니 경비원 임금보다 전기비 비중이 높았다고 한다. 아파트단지 내 조명을 LED(발광다이오드)등으로 교체해 아낀 돈으로 경비원 임금을 보전했다고. 어느 부분을 풀어야 할지 정확히 본 거다. 판을 깔아주니 주민들의 속속들이 깨알 같은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일요일은 경비원 쉬게 해주자, 4명 근무가 3명으로 줄어도 감수하겠느냐, 택배도 안 오는 날이니 괜찮을 것 같다, 꼼수 쓰지 말고 진짜 쉬게 하면서 최저임금 보장하는 쪽으로 가자….”
- 현실을 느끼고 애로점도 알고 양보해가면서. 각자 입장만 내세우는 구도에선 섞일 수 없었던 것들이 섞이기 시작하는 거구나.
“지금 정부에게 최저임금 인상은 당위다. 대신 일자리 안정자금 13만원을 준다. 채찍과 당근이다. 시장의 대응이 뒤따른다. 경비원 자르고 간접고용으로 바꿔 용역 준다든지, 기계 도입하거나 차라리 젊은 경비원 뽑는다든지. 간극이 뚜렷하다. 시민회의는 여기에 자치의 논리를 들여왔다. 정부나 시장 논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양보·조정·약속하는 방식이다. 돈을 많이 받기(최저임금 인상)보다 오래 일하고 싶다(고용안정)는 경비원 목소리도, 관리비 인상은 부담되지만 생활상의 다소간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주민 목소리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게 과정을 만들어가며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한다. 이 의미가 크다.”
- ‘과정’과 ‘경험’. 정부 방침대로 시행하는 것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 아닌가.
“질의응답과 모둠토론의 ‘숙의 세트’를 3차례 거쳤다. 그러면서 모인 의견을 정리해 화면에 실시간으로 띄웠다. 변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니 지루할 새가 없다. 스스로 참여해 바꾼다는 효능감도 피부로 느낀다. 굉장한 교육 효과다.”
- 구청은 권고안을 그대로 이행해야 하나.
“권고안에 강제력은 없지만 이행하리라 본다. 구청장도 의지를 보였다.”
- 성북구에 서울지역 아파트 경비원의 약 40%가 몰려있는 걸로 안다. 다른 자치구나 개별 아파트에도 좋은 선례가 될 듯한데.
“의미 있는 참고사례가 됐으면 한다. 정부가 거시적 수준의 얘기만 하면 이런 미시 단위까지 제대로 안 내려온다.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굴절’이 일어나는 이유다. 작지만 좋은 실천사례는 없는지, 그걸 어떻게 유형화할지 세세하게 점검·발굴하는 노력이 같이 가야 한다. 장은 마련하되 중앙정부가 일일이 다 할 수 없으므로 기초단체 역할이 중요해진다.”
- 압구정 현대 경비원 집단 해고가 논란이 됐다. 도덕적·윤리적 비판을 받는데 어떤 측면에선 합목적적 판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파트 주민들의 선의에만 기대기엔 ‘공백’이 있는 것 같고. 해서 모의 시민회의 모델이 흥미롭다.
“제도화가 핵심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작은 단위에서 자치의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모의 시민회의나 동별 주민총회를 열어 예산 문제를 다루는 것도 그 한 형태고. 꼭 회의 방식이 아니라도 비공식적 관습과 규범을 만들어가는 것 역시 넓은 의미의 제도다.”
- 일단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선거부터 제대로 하자는 얘기로 들린다.
“아파트단지 하나에 4000~5000세대씩 산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분명 안에서 분출되는 요구가 있다. 그 수요를 반영하는 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안다, 그런 데까지 관심 가질 여유가 별로 없다는 거. 그러는 사이에 회장 하던 사람이 계속 한다. 부정과 비리의 여지가 생긴다. 계속 연임 못하도록 정부가 규정을 만들었다. 어떻게 됐는지 아나. 패거리를 만들어 실세는 뒤로 빠지고 자기네끼리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는다. 이런 작은 것부터 바꿔야 한다.”
- 작지만 직접 바꾸는 경험의 축적.
“앞에 얘기한 사례 있지 않나. LED등으로 교체해 아낀 돈으로 아파트 관리비 충당한 케이스. 그런 분이 ‘숨은 시민 영웅’이다. 노력을 통해 실제로 관리비가 내려가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입주민대표회의에 관심도 갖고 참여해 뭔가 해보려 하겠지. 그게 바로 정치 아닌가?”
아파트 경비원 해고 사태, 모의 시민회의 모델을 물어보며 시작한 인터뷰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자치’로 넘어갔다.
- 결국 자치의 문제다. 토크빌적 의미인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인은 관료를 찾아가고 영국인은 지주에게 간청하는데 미국인은 모이더라, 그래서 별 시시콜콜한 결사체까지 만들어 해결책을 찾더라는 거지. 토크빌이 ‘시민참여의 예술(art of association)’이라 표현했다. 풀뿌리 차원 기초체력을 다져 민주주의가 굴러가도록 만드는 게 선진모델이다.”
- 이른바 동네 민주주의, 주민자치의 필요성이다.
“독일이 왜 축구를 잘하나. 동네 축구부터 잘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다. ‘보충성의 원칙’(주민과 밀접한 사무는 기초단체, 기초단체가 처리하기 어려운 사무는 광역단체, 광역단체가 처리하기 어려운 사무는 정부 사무로 배분)이란 게 있다. 가급적 작은 단위에서 해결하되 잘 안 될 때 올려보내는 방식이 돼야 한다. 위에서 내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일자리 안정자금 13만원씩 준다는데도 신청이 저조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잖나. 정치학자 중에서도 최장집 교수 같은 분은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을 중시하는데.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다. 직접과 대의민주주의는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제가 얘기하려는 건 이거다. 정치를 청와대와 여의도로만 한정하지 말자. 제왕적 대통령제 한 방에 고치는 개헌 중요한데, 그 수평적 분권(삼권분립)을 받쳐주는 수직적 분권(주민자치)도 같이 가자.”
- 촛불로 대변되는 광장민주주의와의 변별점은 제도화에 있다고 보면 될까.
“저 ‘식견 있는 비판적 시민’들의 분출하는 요구를 어떻게 받아 해결할 것인가. 밑으로부터의 협치가 시대정신이라 본다. 촛불 들고 광화문만 나간 게 아니다. 각 영역의 요구들이 쏟아진다. 이제 동네와 직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기존 위계(hierarchy)가 무너진다. 촛불은 자치다.” - 이를테면 서지현 검사 같은….
“정치란 기본적으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개인이 각 영역에서 촛불을 드는 ‘미투 현상’은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분권’이다. 새로운 요구를 가진 시민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분권형 개헌, 민주시민교육, 두 가지를 큰 축으로 정교하게 제도를 만들면서 우수모델과 사례를 실험·발굴·전파하는 게 중요하다.”
- 지방분권이 개헌의 화두가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긴 한데.
“표현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중앙정부의 권력을 지방으로 나눠준다는 뉘앙스라.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맞다. 아까 말한 보충성의 원칙이 그거다. 물론 간단하지는 않다. 분권은 혼란을 수반한다. 님비(NIMBY), 담합 같은 현상도 생길 수 있고. 단박에 잘 안 될 거다. 이런 우려에 답하자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풀뿌리 단계에서만 100% 하자는 것도 아니다. 대체가 아니라 보완이다. 무엇보다 시대가 변했다.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 분권, 좋은데 지역간 격차 문제는 어떻게 하나.
“빈익빈 부익부 우려가 있다. 그래서 분권과 지방균형이 같이 갈 필요가 있다.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강남구 독립’ 얘기가 나왔지 않느냐(웃음). 그런 다툼이 왜 없겠나. 하다못해 구 예산 정할 때도 우리 동네에 놀이터 짓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시민들이 이해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
-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도 그런 얘기를 했다. 강남구 세금을 걷어 서울시 전체가 나눠 쓰는 사례를 들기도 하더라.
“분권을 하면 지역간 격차로 인해 균형발전과 상충된다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에 중앙정부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은 교부금 제도로 나눠주고 있는데, 이걸 풀어주면서 잘 조정해야 한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 거지.”
- 시민사회 자율성을 키우면서 정부는 조정자가 되는 상을 그리는 것인가.
“영국 캐머런 정부가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를 내세웠다. 정부가 아니라 공동체사회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구의회, 시의회도 더 활발히 견제·감시해야 한다. 자치뿐 아니라 하위 단계 대의제까지 더 충실하게 구현하는 형태다. 수직과 수평 두 축을 촘촘하고 다층적으로 채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최근 한국정치학회장에 취임했다. 청와대와 여의도, 큰 정치부터 우선시하라는 주변 조언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 교수는 동네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풀뿌리 자치가 정치의 근간이 돼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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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