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시에 따르면 이 기념 공간은 고은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자 지난해 11월 서울도서관 3층에 마련한 '만인의 방'이다.
이곳은 고은 시인이 자신의 대표작 '만인보'(萬人譜)에서 따 직접 이름 붙인 공간이다.
시인이 25년간 '만인보'를 집필한 경기도 안성시 '안성서재'를 재현한 곳과 기획전시 공간 등으로 꾸며졌다.
시는 만인보' 가운데 한용운·이육사·김구 등 항일 운동에 투신한 위인에 대한 육필 원고 원본을 전시하는 등 내년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예산 약 3억원을 들여 이곳을 의욕적으로 꾸민 바 있다.
이곳은 지난해 11월 개장 이래 평일 하루 10∼15명, 주말 30여 명이 방문하는 등 꾸준히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과거 후배 문학인을 대상으로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울시와 서울도서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평소 '페미니스트'임을 수차례 자처하는 등 여성의 권리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고은 시인 기념 공간이 서울도서관에 자리하는 것이 시정 철학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논란이 불거진 이후 서울도서관에는 '만인의 방'과 관련한 시민의 문의나 항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은 "최근 일어난 사태 때문에 '만인의 방'을 서울도서관에 설치한 의미가 퇴색된 것이 아니냐. 서울도서관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다른 시민은 아예 "'만인의 방'을 철거해야 한다"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도서관 관계자는 "'만인의 방'은 '만인보' 등장인물 가운데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도 있는 등 민(民)의 역사를 다룬 시집이라 그 의미를 높이 사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조성한 공간"이라며 "3·1 운동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이런 일이 터져 우리도 매우 당황스럽다"고 난감해 했다. 그러면서 "고은 시인 개인보다 작품 자체의 의미를 들여다봤을 때 지금 당장 이 공간을 없애자 말자 결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일단 사태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만인의 방'이 당장 헐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곳과 연계해 계획했던 각종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 내지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올해 4월 프랑스에서 '만인보'를 연구하던 교수가 서울을 찾아 고은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포럼이 예정됐지만, 이번 일로 진행이 불투명하게 됐다.
또 '만인보' 원고를 디지털 스캔해 온라인에서 손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구축하려는 계획도 당분간 진행이 어렵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서울도서관 관계자는 "원래 내년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만인의 방'과 관련된 행사를 여럿 기획했다"며 "그러나 이제는 전문가 포럼 같은 행사를 열기가 어려워지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