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반올림'과의 전화통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약간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기자가 반도체 관련 직업병 문제를 제기해온 시민단체 ‘반올림’ 관계자와 통화한 것은 지난 13일이다. 반올림 측은 고용노동부가 공개를 결정한 삼성전자 온양공장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보고서’에 대해 “산업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 사용 화학물질의 10% 이하만 공개되고, 그마저도 과거부터 알려져 있던 정보”라는 주장이었다. 고용부 실무자 설명은 정반대였다. “공개되지 않는 화학물질이 극히 일부이며, 공정별 사용 종류와 양까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부적인 사실 관계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통화 내내 반올림 측이 강조한 “반도체 노동자의 생명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가치’에 대해서다.

반도체 근로자의 생명권이 중요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반올림이 지난 11년간 대립각을 세워온 삼성전자도 현장 근로자들이 귀찮아할 만큼 안전 수칙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반올림이 주창하는 가치만으로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판단할 수는 없다.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백혈병 사망자가 나온 삼성전자 온양공장을 ‘죽음의 공장’이라고 부르지만, 후공정을 담당하는 온양공장이 없으면 삼성전자 반도체의 제품화가 불가능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산업재해와 죽음만 쳐다보고 있으면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산업 ‘가치’를 온전하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재판부 결정에 따라 삼성전자의 후공정 관련 노하우는 20일 반올림 활동가 손에 넘어간다. 기자는 반올림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해당 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부에 노출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자료에 대한 분석을 끝낸 이후가 걱정이다. 벌써부터 산업 기밀이라고 할 만한 정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관련 정보를 제대로 보관·관리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표 산업자산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은 과거의 시비를 가리는 것만큼 중요하다. 삼성전자의 후공정 기술에는 반올림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반도체 근로자들의 피와 땀도 어려 있다. 아무쪼록 조심해서 다뤄 주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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