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조원 굴리는 국민연금이 자초한 '푸대접'
해외에서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지인에게 “얼마를 벌면 은퇴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1000억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 1000억원이냐”고 묻자 “1000억원 정도면 증권사 등으로부터 기관투자가 대접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굴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기관투자가 대접’이란 개인투자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 정보와 각종 거래 플랫폼을 제공받는 걸 뜻한다.

그 지인이 1000억원을 번다면 아마도 개인 돈을 굴리는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글로벌 자산운용사에서 경험을 쌓은 인재를 최고투자책임자(CIO)로 뽑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뽑은 CIO는 골드만삭스 같은 세계 유수의 증권사에서 서비스를 받으며 지인의 돈을 안정적으로 굴려줄 것이다.

1000억원이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보다 6000배나 많은 돈을 맡겨놓고도 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작년 11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굴리는 돈은 615조원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연기금이다.

세계 최고의 경영대학원인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HBS)을 졸업하고 블랙록 같은 글로벌 자산운용사에서 근무하는 인재를 수십 명 스카우트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런데 국민연금의 CIO 격인 역대 기금운용본부장 중 그런 경력을 보유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대로 된 운용 경험을 갖춘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그런 인재가 몰려들 수 있는 토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CIO가 받는 연봉은 3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글로벌 자산운용사에 입사한 1~2년차가 받는 돈이다.

임기는 2년. 운이 좋으면 1년 연장된다. 퇴사 후엔 3년 동안 금융회사 취업이 제한된다. 작년 2월부터는 근무지도 전북 전주로 바뀌었다. 심지어 정치적인 일에 휘말리면 감옥에 가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기금이사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차기 기금운용본부장을 뽑는 절차에 들어갔다고 19일 발표했다. 강면욱 전 본부장이 사퇴한 작년 7월 이후 7개월여 만이다. 이례적으로 긴 공백을 지켜보며 금융투자업계는 혹시 능력있는 CIO를 뽑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어 왔다.

우수한 인재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7개월이 아니라 1년이 걸려도 상관없다는 게 업계 시각이었다. ‘임기제를 없애고 연봉을 획기적으로 올리고 지배구조를 뜯어 고치려면 부처 간 협의도 필요할 테니 오래 걸릴 수 있겠다’는 게 업계 구성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추천위를 꾸렸다는 지금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드디어 코드에 맞는 인물을 찾았나보다’는 자조적인 추측만 나올 뿐이다.

한국 국민이 소득의 9%씩 꼬박꼬박 모아 조성한 노후자금 615조원이다. 이제라도 세계 최고의 전문가를 뽑아 제대로 운용해야 한다. 국민은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