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사설 깊이 읽기] 의료와 병원을 '공공의 가치'에 묶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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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투자개방형 병원 헛바퀴 16년, 백서로 만들어보자
정부가 지난 7일 열린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에 해외 의료자본을 유치해 투자개방형 병원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국내 병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투자개방형 국제병원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동북아 의료허브’ 육성을 목표로 시작됐다.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육성책이어서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투자개방형 병원 정책은 16년 동안 헛바퀴만 돌다 멈춰선 셈이 됐다. 경제자유구역 등에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병원인데도 외국 자본이 운영하는 병원이 의료 공공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시민단체와 이익집단의 계속된 반발을 넘지 못한 것이다. 오랜 기간 거듭된 토론과 논의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또다시 ‘기·승·전·원점’이 된 사례다.
다른 투자개방형 병원인 제주 녹지국제병원도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다. 병상이 47개에 불과한 병원으로 법 절차를 밟아 정부 승인까지 받았지만, 시민단체들이 ‘국내 제1호 영리병원’이라며 반대하고 나서자 제주도가 최종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반면 세계 각국은 앞다퉈 의료 분야에 대한 투자 규제를 풀고 있다. 아시아권만 해도 일본과 싱가포르뿐 아니라 태국이 의료를 관광과 연계한 고부가 서비스산업으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해외로 가는 의료관광을 줄이기 위해 병원에 대한 외국인 투자제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공성’이라는 도그마에 갇힌 한국에선 의료규제 완화가 제자리걸음만 거듭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가능한 원격진료와 의료빅데이터 활용이 시민단체와 의사 등 이익집단의 강한 반대에 막혀 있다. 보건의료 분야 개혁을 무조건 의료민영화로 몰아 반대하는 ‘공공의료 근본주의’ 주장에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다.
16년이나 끌고도 투자개방형 병원 정책이 왜 좌초했는지, 누가 어떤 주장을 했기에 발목을 잡히고 만 건지 모든 과정을 백서로 남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2월9일자> ‘투자개방형 병원’이라는 말이 정착되는 데도 긴 시일이 걸렸다. 당초 ‘이념’이나 ‘가치’와 관계없이 쓰였던 ‘영리병원’이라는 말은 ‘공공의료’라는 특정 이념적 기반의 구호 아래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문제의 본질은 용어의 적합성 차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의료와 병원은 ‘공공의 가치’ 아래 묶여버렸다. 이 문제에서는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건설적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수많은 민간 병원들이 수지를 맞추려 온갖 힘을 다하고, 이익과 성장을 추구하는 현실과도 딴판이었다. 한국 의료가 고부가 가치의 고유 산업으로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서비스 산업으로서 의료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도 안 되는 이유다.
아직 사회주의의 틀을 유지하는 중국이나 베트남도 외국 자본의 의료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한국이 곧잘 한 단계 수준이 낮은 국가로 여기는 태국 같은 곳에서도 ‘상업 의료’는 크게 발달해 있다. 의료 기술과 관광을 겸하는 ‘의료 관광’이 국가적 전략 산업이 된 곳이 태국이나 싱가포르만도 아니다.
‘공공’ 구호에 갇혀 정체되고 있는 의료산업의 한계점을 단지 의료 차원의 문제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나’라는 차원에서 볼 필요도 있다. 원격진료 문제는 더욱 그렇다. 빼어난 정보기술(IT)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19년째 시범사업만 벌이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오는 4월부터 원격의료를 건강보험에 적용하며 보편적 시행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이 또 한 분야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 원격진료에 대한 일부 의사들의 반대는 ‘병원업계의 골목상권 보호 주장’이라고 할 정도다.
기술도 확보돼 있고 소비자도 원하는 원격진료가 19년째 막힌 것이나 투자개방형 병원이 16년 만에 무위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료의 과학화·산업화가 안 되면서 생기는 피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투자개방형 병원이 결국 무위로 끝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국제사회의 흐름과 어긋나는 게 투자개방형 병원 문제만은 아니다. 갈라파고스처럼 한국만 고립되는 일이 많다. 결과는 국제경쟁력 저하요, 정체와 퇴행의 길이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정부가 지난 7일 열린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에 해외 의료자본을 유치해 투자개방형 병원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국내 병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투자개방형 국제병원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동북아 의료허브’ 육성을 목표로 시작됐다.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육성책이어서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투자개방형 병원 정책은 16년 동안 헛바퀴만 돌다 멈춰선 셈이 됐다. 경제자유구역 등에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병원인데도 외국 자본이 운영하는 병원이 의료 공공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시민단체와 이익집단의 계속된 반발을 넘지 못한 것이다. 오랜 기간 거듭된 토론과 논의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또다시 ‘기·승·전·원점’이 된 사례다.
다른 투자개방형 병원인 제주 녹지국제병원도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다. 병상이 47개에 불과한 병원으로 법 절차를 밟아 정부 승인까지 받았지만, 시민단체들이 ‘국내 제1호 영리병원’이라며 반대하고 나서자 제주도가 최종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반면 세계 각국은 앞다퉈 의료 분야에 대한 투자 규제를 풀고 있다. 아시아권만 해도 일본과 싱가포르뿐 아니라 태국이 의료를 관광과 연계한 고부가 서비스산업으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해외로 가는 의료관광을 줄이기 위해 병원에 대한 외국인 투자제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공성’이라는 도그마에 갇힌 한국에선 의료규제 완화가 제자리걸음만 거듭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가능한 원격진료와 의료빅데이터 활용이 시민단체와 의사 등 이익집단의 강한 반대에 막혀 있다. 보건의료 분야 개혁을 무조건 의료민영화로 몰아 반대하는 ‘공공의료 근본주의’ 주장에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다.
16년이나 끌고도 투자개방형 병원 정책이 왜 좌초했는지, 누가 어떤 주장을 했기에 발목을 잡히고 만 건지 모든 과정을 백서로 남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2월9일자> ‘투자개방형 병원’이라는 말이 정착되는 데도 긴 시일이 걸렸다. 당초 ‘이념’이나 ‘가치’와 관계없이 쓰였던 ‘영리병원’이라는 말은 ‘공공의료’라는 특정 이념적 기반의 구호 아래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문제의 본질은 용어의 적합성 차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의료와 병원은 ‘공공의 가치’ 아래 묶여버렸다. 이 문제에서는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건설적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수많은 민간 병원들이 수지를 맞추려 온갖 힘을 다하고, 이익과 성장을 추구하는 현실과도 딴판이었다. 한국 의료가 고부가 가치의 고유 산업으로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서비스 산업으로서 의료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도 안 되는 이유다.
아직 사회주의의 틀을 유지하는 중국이나 베트남도 외국 자본의 의료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한국이 곧잘 한 단계 수준이 낮은 국가로 여기는 태국 같은 곳에서도 ‘상업 의료’는 크게 발달해 있다. 의료 기술과 관광을 겸하는 ‘의료 관광’이 국가적 전략 산업이 된 곳이 태국이나 싱가포르만도 아니다.
‘공공’ 구호에 갇혀 정체되고 있는 의료산업의 한계점을 단지 의료 차원의 문제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나’라는 차원에서 볼 필요도 있다. 원격진료 문제는 더욱 그렇다. 빼어난 정보기술(IT)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19년째 시범사업만 벌이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오는 4월부터 원격의료를 건강보험에 적용하며 보편적 시행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이 또 한 분야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 원격진료에 대한 일부 의사들의 반대는 ‘병원업계의 골목상권 보호 주장’이라고 할 정도다.
기술도 확보돼 있고 소비자도 원하는 원격진료가 19년째 막힌 것이나 투자개방형 병원이 16년 만에 무위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료의 과학화·산업화가 안 되면서 생기는 피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투자개방형 병원이 결국 무위로 끝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국제사회의 흐름과 어긋나는 게 투자개방형 병원 문제만은 아니다. 갈라파고스처럼 한국만 고립되는 일이 많다. 결과는 국제경쟁력 저하요, 정체와 퇴행의 길이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