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미 통상마찰 해법, 역사에서 찾아라
한·미 통상마찰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통상마찰 배경과 전개상황이 비슷하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미국의 부강과 풍요’를 내세웠는데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감세와 규제완화, 대외적으로는 ‘공정무역을 표방하는 신(新)중상주의 보호무역정책’이다. 또 주 공격목표가 레이건 시대에는 일본이었고 지금은 중국이지만, 실질적으로 불똥이 튄 나라는 한국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부분 수출품목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와 규제 수단이 다양하게 망라된 점에서도 그렇다.

당시엔 한국을 개발도상국·동맹국으로 봐주던 때였는데, 그런 가운데 맞은 통상압력은 한국으로선 국가 비상사태 수준이었다. 미국은 컬러TV와 앨범 반(反)덤핑 제소, 철강 등 상계관세 조사, 섬유의 수입동결 법안 상정, 신발의 세이프가드 조치와 반도체의 특허권 침해조사 등 한국의 주요 수출품을 거의 다 걸어 놓은 듯했다. 거기에다 한국의 첨단제품과 서비스 및 농축산물에 대한 시장개방과 지식재산권 보호, 공정무역 준수 등을 요구하면서 가장 강력한 미 통상법상 제재수단인 ‘슈퍼 301조’ 발동이란 으름장도 놓았다. “혈맹이 이럴 수 있나” 하는 원망이 커졌고, 서울 광화문에서는 영세 앨범업자들이 손수레에 앨범을 실어와 투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반미감정이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한국은 시행착오와 비용을 치르면서 조금씩 대응능력을 갖추게 됐다. 필자는 그때 상공부에서 미국담당 과장을 하면서 지휘부에도 있었고, 워싱턴DC에 상무관으로 파견돼 ‘현장 소방대장’ 역할도 했다. 우리는 미국 상·하원 의원과 소비자단체, 수입업계, 농산물 생산단체, 방위산업계 등 양국 통상마찰 해소에 도움이 될 친한(親韓)세력을 결집해 편지쓰기 등 미 정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행사를 유도했다. 미국 유수의 법률회사와 로비스트를 고용해 방어·설득 논리를 개발했다. 정부 통상조직도 보강하고 전문인력도 키웠다.

그 결과 미국 측에서도 애칭으로 부르는 우리 측 고위 협상전문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즈니스의 도시가 아닌 워싱턴DC에 한국무역협회와 주요 대기업의 지사도 개설해 현지투자를 확대하고 미국상품 구매사절단도 파견했다. 스웨터 덤핑제소 때처럼 미국 언론기고가 분위기를 반전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당시 통상마찰의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그후 약 30년간 비교적 원만하고 세련된 양국 통상관계를 이어왔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 정부에 들어와서 한·미 양국은 다시 심각한 통상마찰을 겪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한국산 세탁기·태양광 패널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데 이어 철강제품에는 ‘안보’를 내세워 치명적 수준의 관세를 매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의 통상전선은 1980년대처럼 조직적이지 못하다. 통상 주무부처는 여러 번 바뀌었고 협상 전문인력도 예전 같지 않다. 업계의 대응도 아쉬운 수준이다. 그러나 늦지는 않았다. 통상문제에 대한 범정부적 지휘부를 명확히 하고 현지 조직망을 보강해야 한다. 통상교섭본부에 부처 간 교섭지침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협상 지휘 역할도 늘려야 한다. 다시 통상 전문인력을 키우고 현지투자와 대미 수입촉진, 수출 자율규제 등 교섭수단도 정부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 미국 내 우호세력도 다시 정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필요한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등에 제소를 해야 하겠지만 검(劍)만이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방패를 단단히 만들어야 하고 체력을 기르고 ‘당근’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통상전문인력에 대한 국민의 성원이 아쉽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지켜봐야 한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