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의 왕'을 만나다··· '성철스님 임제록 평석' 출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성철 스님 법문 녹음 40여년 만에 풀어 출간
시자 원택 스님과 손상좌들까지 힘 합쳐 정리·번역
대중 눈높이 맞춰 설명하면서도 “말에 속지 마라” 강조
시자 원택 스님과 손상좌들까지 힘 합쳐 정리·번역
대중 눈높이 맞춰 설명하면서도 “말에 속지 마라” 강조
“후한 명제 10년(서기 67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500년 동안은 인도에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하던 ’역경의 시대‘였고, 그 뒤 300년은 천태·법상·화엄종과 밀종·율종 등 ’교학의 시대‘였다. 선종은 달마대사가 전한 이래 육조혜능을 거쳐 마조(709?~788)에 이르러 크게 흥성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중엽까지는 이들 다섯 종파와 선종이 흥성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1912~1993)은 중국 불교의 초기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마조 문하에서는 걸출한 선지식이 많이 배출됐다. 그 제자들이 위앙종·임제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 등 선종 5가를 이뤘다. 그 중에서도 임제종과 조동종의 법맥이 길게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선맥과 선풍이 활발한 것은 임제종이 유일하다. 당나라 후기의 임제의현(?~867)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 법맥은 간화선을 제창한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 고려의 태고보우·나옹혜근·백운경한으로 이어져 지금의 조계종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제 스님의 법문을 제자 삼성혜연이 기록한 ‘임제록(臨濟錄)’을 ‘선어록의 왕(王)’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법맥 때문만은 아니다. 마조-백장-황벽으로 전해진 법을 계승한 임제는 동아시아 선종의 황금시대를 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어딜 가든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진리다)‘’무위진인(無位眞人·일체의 분별에서 벗어난 참사람)‘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등 수많은 선의 명언이 기록된 것도 바로 ’임제록‘이다.
성철 스님이 임제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성철스님 임제록 평석》(장경각 펴냄)이 출간됐다. 해인총림 방장이던 성철 스님이 1974년 하안거부터 이듬해 하안거까지 보름마다 강설했던 법문의 녹음테이프를 정리하고 보완해 책으로 낸 것. 성철 스님을 마지막까지 곁에서 모셨던 시자 원택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은 “성철 스님의 법문은 1993년 열반 직전에 대부분 법문집으로 출간됐으나 임제록은 전반부의 중요한 대목인 ’마방의 서‘’상당법문‘’시중‘의 앞부분까지 평석을 하시다 중단해 나머지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며 ”성철 스님께서 평석하신 부문은 그대로 정리하고 나머지 부분은 번역만 해서 출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원택 스님은 물론 원택 스님의 두 상좌가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임제록의 4분의 1 정도만 강설하다 중단한 데다 녹음상태가 불량하고, 자주 인용하는 조사 스님들의 선구(禪句)들이 어려워 듣고 받아 쓰기도 쉽지 않아 임제록 출간이 더욱 조심스러웠다“며 ”그런데 지난 동안거를 앞두고 상좌 둘이 찾아와 임제록을 녹취한 메모리카드를 내밀며 임제록 출간을 청했다“고 밝혔다.
메모리카드를 열어보니 노스님의 육성을 제대로 담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대장경 프로그램을 활용한 덕에 까다로운 한문 인용도 잘 정리돼 있었다. 원택 스님은 “다행히 1989년에 선림고경총서 제12권으로 ’임제록·법안록‘을 출판할 때 큰스님이 임제록에 현토(懸吐·한문에 토를 다는 것)를 해 두셔서 강설하신 부분은 그대로 싣고, 강설이 없는 부분은 새로 번역해 보충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성철 스님은 친견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3000배를 요구했을 만큼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불자와 대중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된 후 그해 동안거를 맞이해 약 100일 동안 상당법문과는 별도로 대중들을 위해 불교를 총체적으로 강설한 ’백일법문‘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상당법문이나 백일법문이 어려워서였을까. 성철 스님은 “몇 해를 상당법문 식으로 설법했는데,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며 임제록을 평석(評釋)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근본법은 아니지만 대중 귀에 좀 담기는 법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임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책을 보면 성철 스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가령 책의 첫머리에 있는 ‘마방의 서’ 맨앞에 나오는 ‘黃檗山頭 曾遭痛棒(황벽산두 증조통방·황벽산에서 일찍이 호되게 몽둥이를 맞고)’라는 짧은 구절을 놓고 6쪽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낸다. 약초가 많이 나는 복건성의 황벽산에서 임제 스님이 무슨 일로 황벽 스님한테 몽둥이를 맞았는지를 설명하면서 황벽 스님은 누구이며 어떤 법을 설했는지, 임제 스님은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일화를 남겼는지 소상하고도 재미나게 들려준다. 이런 설명이 없다면 공부가 얕은 일반 대중이 임제록을 읽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성철 스님은 말에 현혹되고 속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원오극근 선사(1063~1135)는 ’선종 제일의 책‘으로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을 다 쓰고서 제100칙의 끝에 이렇게 썼다. ”‘만 섬 곡식 배에 가득 실어 마음대로 집게 두었는데, 오히려 한 톨 쌀알 때문에 뱀이 독 안에 갇혔구나. 옛 공안(公案) 일백여개를 설명해 들려주었으니, 사람들 눈에 얼마나 많은 모래를 뿌린 것일까.’ 불가피하게 말과 글로 설명은 했지만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옛 공안을 소개한 것이 멀쩡한 사람들 눈에 모래를 뿌린 꼴이 된다는 얘기다. 성철 스님은 이렇게 강조했다.
“누구든지 임제 스님이 하신 말씀을 실법(實法)인 줄 알고 임제 스님 말만 따라가고 내 입만 따라오는 사람한테는 이것이 자기도 남도 전부 죽이는 설비상(雪砒霜·독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말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바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말을 따라와 말 밑에서 고꾸라져 죽는 사람은 절대로 바라지 않습니다.” 592쪽, 2만5000원.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1912~1993)은 중국 불교의 초기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마조 문하에서는 걸출한 선지식이 많이 배출됐다. 그 제자들이 위앙종·임제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 등 선종 5가를 이뤘다. 그 중에서도 임제종과 조동종의 법맥이 길게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선맥과 선풍이 활발한 것은 임제종이 유일하다. 당나라 후기의 임제의현(?~867)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 법맥은 간화선을 제창한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 고려의 태고보우·나옹혜근·백운경한으로 이어져 지금의 조계종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제 스님의 법문을 제자 삼성혜연이 기록한 ‘임제록(臨濟錄)’을 ‘선어록의 왕(王)’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법맥 때문만은 아니다. 마조-백장-황벽으로 전해진 법을 계승한 임제는 동아시아 선종의 황금시대를 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어딜 가든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진리다)‘’무위진인(無位眞人·일체의 분별에서 벗어난 참사람)‘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등 수많은 선의 명언이 기록된 것도 바로 ’임제록‘이다.
성철 스님이 임제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성철스님 임제록 평석》(장경각 펴냄)이 출간됐다. 해인총림 방장이던 성철 스님이 1974년 하안거부터 이듬해 하안거까지 보름마다 강설했던 법문의 녹음테이프를 정리하고 보완해 책으로 낸 것. 성철 스님을 마지막까지 곁에서 모셨던 시자 원택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은 “성철 스님의 법문은 1993년 열반 직전에 대부분 법문집으로 출간됐으나 임제록은 전반부의 중요한 대목인 ’마방의 서‘’상당법문‘’시중‘의 앞부분까지 평석을 하시다 중단해 나머지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며 ”성철 스님께서 평석하신 부문은 그대로 정리하고 나머지 부분은 번역만 해서 출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원택 스님은 물론 원택 스님의 두 상좌가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임제록의 4분의 1 정도만 강설하다 중단한 데다 녹음상태가 불량하고, 자주 인용하는 조사 스님들의 선구(禪句)들이 어려워 듣고 받아 쓰기도 쉽지 않아 임제록 출간이 더욱 조심스러웠다“며 ”그런데 지난 동안거를 앞두고 상좌 둘이 찾아와 임제록을 녹취한 메모리카드를 내밀며 임제록 출간을 청했다“고 밝혔다.
메모리카드를 열어보니 노스님의 육성을 제대로 담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대장경 프로그램을 활용한 덕에 까다로운 한문 인용도 잘 정리돼 있었다. 원택 스님은 “다행히 1989년에 선림고경총서 제12권으로 ’임제록·법안록‘을 출판할 때 큰스님이 임제록에 현토(懸吐·한문에 토를 다는 것)를 해 두셔서 강설하신 부분은 그대로 싣고, 강설이 없는 부분은 새로 번역해 보충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성철 스님은 친견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3000배를 요구했을 만큼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불자와 대중에게 불법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된 후 그해 동안거를 맞이해 약 100일 동안 상당법문과는 별도로 대중들을 위해 불교를 총체적으로 강설한 ’백일법문‘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상당법문이나 백일법문이 어려워서였을까. 성철 스님은 “몇 해를 상당법문 식으로 설법했는데,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며 임제록을 평석(評釋)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근본법은 아니지만 대중 귀에 좀 담기는 법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임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책을 보면 성철 스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가령 책의 첫머리에 있는 ‘마방의 서’ 맨앞에 나오는 ‘黃檗山頭 曾遭痛棒(황벽산두 증조통방·황벽산에서 일찍이 호되게 몽둥이를 맞고)’라는 짧은 구절을 놓고 6쪽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낸다. 약초가 많이 나는 복건성의 황벽산에서 임제 스님이 무슨 일로 황벽 스님한테 몽둥이를 맞았는지를 설명하면서 황벽 스님은 누구이며 어떤 법을 설했는지, 임제 스님은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일화를 남겼는지 소상하고도 재미나게 들려준다. 이런 설명이 없다면 공부가 얕은 일반 대중이 임제록을 읽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성철 스님은 말에 현혹되고 속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원오극근 선사(1063~1135)는 ’선종 제일의 책‘으로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을 다 쓰고서 제100칙의 끝에 이렇게 썼다. ”‘만 섬 곡식 배에 가득 실어 마음대로 집게 두었는데, 오히려 한 톨 쌀알 때문에 뱀이 독 안에 갇혔구나. 옛 공안(公案) 일백여개를 설명해 들려주었으니, 사람들 눈에 얼마나 많은 모래를 뿌린 것일까.’ 불가피하게 말과 글로 설명은 했지만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옛 공안을 소개한 것이 멀쩡한 사람들 눈에 모래를 뿌린 꼴이 된다는 얘기다. 성철 스님은 이렇게 강조했다.
“누구든지 임제 스님이 하신 말씀을 실법(實法)인 줄 알고 임제 스님 말만 따라가고 내 입만 따라오는 사람한테는 이것이 자기도 남도 전부 죽이는 설비상(雪砒霜·독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말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바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말을 따라와 말 밑에서 고꾸라져 죽는 사람은 절대로 바라지 않습니다.” 592쪽, 2만5000원.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