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5일까지 연강홀서 공연
20년 열정 담은 농익은 연기로
광기어린 사랑과 집착 담아내
일복 많고 운 좋은 배우
늘 섭외 끊이지 않아
'정통 멜로'에 도전하고파
극단에서도 봉급을 못 받아 고생하던 어느 날 동료 배우가 말했다. “대학로에 아는 극단이 있는 데 일할 사람을 찾는대.” 박근형 연출이 활동하던 극단 동숭무대였다. 노느니 장독 깬다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음향 보조 일을 했다. 하루는 박 연출이 “그간 살아온 경험을 써보라”고 했다. 고생하며 ‘빌빌댄’ 지난날 얘기를 썼다. 이 얘기는 불완전한 청춘을 응시한 시선으로 1999년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희곡상을 휩쓴 연극 ‘청춘예찬’의 토대가 됐다. 박 연출은 고수희를 주연으로 발탁했다. 고수희는 이 작품을 데뷔작으로 배우가 됐다.
내년이면 데뷔 20년을 맞는 고수희는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 ‘미저리’(4월15일까지)에서 주연 ‘애니’를 맡아 농익은 연기력을 펼쳐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미저리’라는 소설의 작가 ‘폴’을 동경하는 팬 ‘애니’의 광기 어린 사랑과 집착을 담은 이야기다. 미스터리 공포물의 대가 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이다. 길해연 이지하가 고수희와 함께 ‘애니’로 번갈아 무대에 서고, 김상중 김승우 이건명이 ‘폴’을 연기한다.
13일 만난 고수희는 “황인뢰 연출의 연극 ‘미저리’는 서스펜스 스릴러극인 동시에 멜로극”이라며 “애니의 어긋나고 서툰 사랑을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애니는 눈길에서 차가 전복돼 큰 부상을 당한 작가 폴을 집에 데려와 간호하면서 폴과 그의 소설 속 ‘미저리’에게 무섭게 집착한다. 폴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부러뜨리기도 한다.
“무섭고 잔인한 면이 있지만 애니는 외롭고 여린 사람이에요. 사랑을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죠. 관객이 애니의 아프고 모자란 부분에 연민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사랑에 서툴고 뭔가 뜻대로 안 되면 폭발하는 애니의 면면은 제 안에도 있는 모습이에요. 감추고 살던 것을 끄집어 내는 느낌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미저리’는 1991년 개봉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영화에선 배우 캐시 베이츠가 ‘애니’를 연기했다. 고수희는 “제가 캐시 베이츠와 싱크로율(외모가 닮은 정도를 뜻하는 은어)이 3만 퍼센트”라며 “고수희가 보여줄 애니가 어떤 모습일지 관객들이 많이 궁금해할 거라 생각해 부담이 컸다”고 털어놨다. 황 연출은 그에게 “고수희만의 사랑스러움을 살리되 그것이 동시에 섬뜩함으로 느껴지게 표현해달라”고 주문해 ‘고수희표 애니’를 만들어냈다.
그는 스스로를 “일복 많고 운 좋은 배우”라고 말한다. 늘 섭외가 끊이지 않아 연기생활 19년간 배역을 따내기 위한 오디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영화감독 봉준호의 눈에 띄어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뒤 2005년 ‘친절한 금자씨’에서 ‘마녀’ 역할로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괴물’ ‘써니’ ‘타짜’ 등에서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로 2007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고 한·일 합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2009년 일본 요미우리 연극상 여자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분야는 ‘정통 멜로’다.
“예쁜 배우들이 나와서 아름답게만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며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작사에서 ‘투자 안 들어온다’며 제작비는 저에게 대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는 ‘미저리’ 이후엔 지난해 초연에서 호평을 받아 다음달 12~22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재공연하는 ‘옥상 밭 고추는 왜’ 무대에 ‘현자’ 역할로 다시 선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