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현대건설 사장·서울시장 거쳐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
5년 임기 평가는 극과 극…금융위기 극복했지만 각종 비리에 불통 논란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서울시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까지 신화를 써내려 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 피의자로 전락했다.
샐러리맨 신화에서 대통령, 검찰 피의자까지… MB의 여정
어린 시절 이 전 대통령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할 정도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 형인 이상득 전 국회의원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했으나, 어머니와 담판을 벌여 "학비는 한 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야간)에 입학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전 대통령은 고려대 상대에 다니면서도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근근이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6·3 사태의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의 삶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했고, 29세 이사에 이어 35세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이 정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지 않은 새로운 세계였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됐고, 이 와중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 전 대통령이 이 기간 만난 사람이 최근까지 이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BBK 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 씨다.

이 전 대통령은 2002년 제32대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4년 동안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 등 각종 대형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냈다.

덕분에 '불도저'라는 별명과 함께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는 찬사가 있었지만, 개발주의식 행정을 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서울시장으로서의 성과는 대선 가도에 이르는 발판이 됐다.

이 전 대통령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샐러리맨 신화에서 대통령, 검찰 피의자까지… MB의 여정
이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기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이 전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자원 외교를 벌이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경제적 지평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등 2차례의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전 수주, 아덴만 구출 작전의 성공 등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녹색성장 전략을 꾸준히 추진해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유치하고,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를 국제기구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득 전 의원을 비롯해 '정치적 멘토'로 통하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 친인척과 최측근이 줄줄이 구속됐고, 내곡동 대통령 사저 터 특혜 계약 의혹이 일면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아들 시형 씨가 특검 수사까지 받았다.

여기에 '불통 정부'라는 꼬리표도 내내 붙어 다녔다.

정부 출범과 함께 쇠고기 파동이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인사'로 대표되는 인사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4대강 사업은 평가가 가장 극명하게 엇갈리는 분야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중 22조원을 들이는 '대역사'로 해마다 되풀이되는 수해를 근원적으로 막겠다는 의도로 사업을 진행했다.

일각에서는 실제로 4대강 사업으로 홍수가 크게 줄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총체적 부실 사업이었고, 수질 악화와 환경 파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재임 기간 표적수사 논란 속에서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수사를 강행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현재까지 이르는 극심한 갈등의 불씨로 작용했고, 결국 이 전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분석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