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러시아 이중스파이 부녀에 대한 신경가스 독살 기도 사건이 촉발시킨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 분쟁이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긴장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 제재 선봉에 나섰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요 회원국인 독일 프랑스까지 러시아 규탄에 가세했다. 오는 18일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재집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서방과 러시아의 힘겨루기가 거세다. 푸틴 4기 출범과 함께 러시아의 팽창주의 강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NATO를 중심으로 서방 국가들이 결집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영-러 외교 갈등 심화

NATO 대 러 '신냉전' 격화… 이중간첩 암살기도로 제재·보복 악순환
지난 4일 영국 남부 솔즈베리의 한 쇼핑몰에서 러시아 이중간첩 출신인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러시아가 개발한 군사용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에 노출돼 쓰러졌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러시아가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14일 외교관 23명을 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인 15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영국 외교관을 반드시, 곧 추방할 것”이라고 밝히며 실력 행사에 나서면서 양국의 외교 갈등이 커지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함께 맞서야’라는 제목의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영국 정부는 러시아가 영국에서 살인을 기도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동맹국들의 연대를 촉구했다.

미국은 영국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절대적 연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뉴욕을 비롯한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도 군사용 신경가스가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 재무부는 이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개입과 각종 사이버 공격 등의 혐의로 러시아에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제재 대상은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등 기관 5곳과 러시아군 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소속 해커 등 개인 19명이다.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인과의 거래가 금지된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대선 개입 문제로 러시아에 제재 조치를 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며 “보복 조치 준비에 착수했다”고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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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앞두고 안보협력 ‘시험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NATO의 주요 회원국들이 러시아에 대항해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은 “영국에서 벌어진 이중스파이 공격은 수년간 러시아가 가한 무모한 행동의 반복”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서방 4개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러시아에 해명을 요구했다. 노비촉 사용은 화학무기금지협정의 명백한 위반이란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영국과 NATO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후 안보협력을 다지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NATO는 브렉시트와 미국의 고립주의로 인해 분열 위기에 봉착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NATO에서 미국이 과도한 분담금을 내고 있다며 상호방위 조약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방 제재 영향력 축소

영국이 러시아에 대한 추가 경제 제재를 요구할 경우에도 EU가 한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EU는 지난해 시리아 정부군의 반군 점령지 무차별 공습에 대한 러시아군 가담 또는 방조를 놓고 대(對)러 추가 제재를 추진했으나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채택이 무산됐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타격을 받는 일부 회원국들은 6개월 단위로 대러 제재 연장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경제적 손실을 내세워 소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EU에 최대 안보 위협인 동시에 천연가스 등 주요 에너지 공급원이자 수출시장이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즈프롬이 70억달러 상당의 유로펀드 매각을 검토하는 등 러시아의 경제 보복도 예고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추가 제재 조치를 내리더라도 러시아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계속된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지난해 석유 생산량은 하루 1098만 배럴로 30년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방의 기술과 금융에 대한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핵심 산업인 에너지와 가스산업에 타격을 주려던 당초 목표가 빗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럽과 미국 은행들이 철수한 공백을 중국 은행들이 메우고 있고, 미국 기업 대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에너지 분야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