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조원 규모의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도 건설사업 수주전에 한국 정부만 뒷짐을 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 일본은 국가 지도자가 수주 마케팅에 나선 데 비해 한국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입찰 참가를 위한 컨소시엄 구성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업은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외곽 신도시 반다르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 주롱이스트까지 350㎞ 구간을 잇는 것으로 역대 최대 고속철사업이다.

발주처인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당국은 오는 6월 말 입찰을 해 연말에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입찰에 뛰어들기 위해 구성된 국내 컨소시엄의 참여 기업과 기관은 6개. 2016년 27개에 달하던 것이 계속 줄어든 결과다. 지난 1월에도 LS전선, 현대일렉트릭, 효성, LS산전, 대아티아이, 삼표E&C 등이 컨소시엄을 빠져나갔다. 남은 곳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철도시설공단, 현대로템, 현대엔지니어링, SK텔레콤과 현지 업체 한 곳이다.
16조원 동남아 고속철도 수주전… 한국만 뒷짐
공기업이 투자에 소극적인 것이 민간 기업의 이탈을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의 코레일 격인 중국철도건축총공사(CRCC), 동일본철도회사 등이 컨소시엄을 주도하면서 막대한 지분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한국은 입찰 전략을 주도해야 할 코레일과 철도공단이 뒤로 빠진 상태다. 코레일 관계자는 “공사가 해외에 투자한 사례가 없고 지분 투자 시 기획재정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며 “지분투자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공기업이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 첫 고속철사업 수주가 국내 기간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전략적 가치를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민간업계의 불만이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사업의 경쟁 구도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국가 간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입찰을 따내면 건설 철도 전력 통신 등에서 경제적 효과는 물론 향후 글로벌 고속철 사업에서도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최근엔 고속철의 ‘전통 강호’ 유럽의 지멘스 알스톰도 가세해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고속철 수주 및 운행 경험이 풍부해 ‘실력면’에서 한국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철도 수주 세계 10위권인 현대로템은 해외 고속철 수주 실적이 전무하다. 철도 수주 세계 1위인 중국의 CRRC와 8위 일본의 히타치 가와사키 등이 2010년부터 인도네시아, 태국, 미국, 인도 등에서 각각 20조~30조원 규모의 고속철을 수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과 일본은 ‘세일즈 외교’에서도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는 평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은 연간 72조원 규모인 철도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적극 뛰고 있지만 한국은 대통령이 나선 적이 없다. 해외 고속철사업은 건설, 통신, 철도제작회사, 금융회사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한몸’처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수주처럼 국가 지도자급의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수주가 가능하다.

이번 사업과 관련, 시 주석은 2016년 11월과 2017년 5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와 만나 대규모 차관 지원을 약속하면서 고속철사업 수주를 지원했다. 2017년 9월엔 리커창 중국 총리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를 중국으로 초청해 자국 고속철의 우수성을 홍보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 역시 2016년 9월 리셴룽 총리와 만나 고속철 협의를 시작한 데 이어 올 1월엔 대규모 금융지원과 기술이전을 약속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 정상회의에서 양국 지도자를 만나고도 고속철 관련 요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8일 싱가포르를 방문해 한국 기업의 고속철사업 참여를 당부했으나 중국과 일본처럼 구체적인 ‘당근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입찰 준비 단계에선 한국도 중국과 일본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2016년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는 한 달에 두 번씩 국토부 차관 주재로 ‘전 부처 합동 회의’를 열었다. 국토부, 철도공사(코레일), 철도시설공단, 철도연구원, 현대로템, 수출입은행 등 실무자가 모여 촘촘히 전략을 짰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 회의체는 ‘유명무실’해졌다. 정책 순위에서 밀려나면서 회의도 3~4개월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특히 입찰 공고가 나간 지난해 12월부터 중국과 일본 등은 바삐 움직였지만 한국은 철도운영회사 코레일과 철도인프라 담당인 철도공단 수장이 ‘공백’ 상태여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컨소시엄 구성과 지분 투자, 기술이전, 금융지원 등의 핵심 전략을 짜야 하는 시기에 컨소시엄을 주도하는 코레일은 작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7개월간, 철도시설관리공단은 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3개월간 사장이 공석이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