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통상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한 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생산공정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미국과 중국이 통상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한 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생산공정을 점검하고 있다. 한경DB
미국과 중국 간 통상전쟁이 격해지면서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산업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2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주 류허 중국 국무원 부총리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중국이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확대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 기업이 한국과 일본 기업으로부터 구매하는 반도체 물량 가운데 일부를 미국 기업이 공급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오히려 중국이 미국과의 통상전쟁을 피하려고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양측 간 협상 내용을 보고받은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해 중국이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한국과 대만산 반도체 수입을 줄이고 대신 미국산 반도체 구매를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흥정 대상' 된 韓반도체… 美·中 통상전쟁 유탄 맞나
FT는 이 방안이 미국의 두 우방국인 한국 및 대만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며 미국이 중국의 이 같은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투명하다고 덧붙였다. WSJ와 FT의 보도 내용 중 어느 쪽이 사실이든 한국 반도체는 미국과 중국의 흥정 대상이 되면서 유탄을 맞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 반도체산업 무역수지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2012년까지 17억9000만달러 흑자를 내던 미국 반도체 프로세서 산업은 2014년 적자로 돌아섰고, 작년엔 적자폭이 21억2000만달러로 커졌다. 같은 기간 메모리반도체 무역수지 흑자 규모도 29억9000만달러에서 16억5000만달러로 ‘반토막’ 났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이 같은 미국의 통상 압력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면서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반면 반도체 공급은 수요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미국과 중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수입을 제한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공급처가 사실상 없다”고 설명했다.

과점경쟁 구도라는 것도 통상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요인이다. D램의 경우 삼성전자(45.3%), SK하이닉스(27.8%), 미국 마이크론(22.1%) 등 3개사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95.1%에 이른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애플, 화웨이와 같은 대형 휴대폰 제조업체는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3~4개 업체에서 메모리반도체를 동시에 공급받는다”며 “특정 국가를 상대로 통상 규제를 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전했다.

다만 앞으로 반도체 호황이 꺾이면 국내 기업이 1차 규제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과 중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국내 반도체 기업을 압박하고 나선 것도 부담이다. 미국 통상당국인 미 국제무역위원회(USITC)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과 관련된 세 건의 기술에 대해 특허침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지식재산권 침해가 인정되면 USITC는 해당 제품의 수입 금지를 명령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나 중국 정부가 특허 침해, 담합 등 불공정거래를 이유로 대규모 과징금을 매길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2004년 미국 법무부는 당시 삼성전자, 하이닉스, 독일 인피니언, 미국 마이크론 등 D램업체가 담합해 가격을 끌어올렸다는 이유로 1조원에 가까운 벌금을 부과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