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韓외무장관, 美의원 우려에 "하부관리 의욕 때문"
[외교문서] 박종철 사건 외교 파장… 정부 "우발적 사건"
1987년 1월 방한 중이던 미국 의원이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우리 정부가 "우발적 사건"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려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의 파장을 차단하느라 외교당국도 신경을 곤두세운 정황이 30일 공개된 당시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최광수 당시 외무장관은 한국을 방문 중이던 미국 하원 경제사절단을 1987년 1월 19일 오후 면담했다.

이 모임의 '면담요록'에 따르면 사절단 중 존 포터(공화·일리노이) 의원은 최 장관에게 "금일 한국 언론에 보도된 사건과 같은 것은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아 한국의 민주적 노력을 저해(undermine)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 장관은 "금번 학생 변사 사건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이번 사건은 하나의 고립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 장관은 "아마도 하부 관리가 빨리 취조를 끝내 성과를 올리려는 과도한 의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보면 포터 의원과 최 장관이 언급한 사건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월 19일은 경찰이 박 열사에 대한 가혹행위 사실을 시인한 날이기 때문이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당초 주장에도 박 열사에 대한 고문 의혹이 제기되자,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1월 19일 오전 사망 원인이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며 수사관의 가혹행위가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정부가 그해 2월 7일 열린 '범국민추도식'을 '폭력에 의한 민중봉기 시도'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 정부의 입장을 적극 홍보하도록 주문한 정황도 드러났다.

1987년 2월 16일 열린 재외공관장회의 홍보·문화·체육 관계 전체회의를 주관한 최광수 당시 외무장관의 '말씀요지' 자료에 따르면 최 장관은 "최근 발생한 박종철군 사망사건은 불행한 사건으로서 정부는 사건 진상을 규명하며 사건 책임자를 인책한 바 있으며, 정부에 특별기구를 상설 운영하여 이번을 계기로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 재야 불순 단체가 추도회라는 명목하의 2·7 명동 불법집회를 통해 민심을 자극하고 폭력에 의한 민중봉기를 획책하려 했습니다만 이러한 정부의 법질서 유지와 예방조치로 큰 사고 없이 무산된 바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사회안정을 위한 노력에 대하여 일부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왜곡 보도하여 정부의 진정한 노력을 반대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례가 없지 않다"며 "이와 관련 공관장님들의 각별한 노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다.

6·10항쟁 직후인 그해 6월 16일에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선거 경선에 나섰던 제시 잭슨 목사가 김경원 당시 주미대사를 만나 정국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잭슨 목사는 이 자리에서 박종철 사건 및 '김대중의 정치 참여 불허'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한국이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학생, 근로자 및 야당 정치인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를 계속 취할 경우 미국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김 대사는 "(한국의) 인권 상황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만약 인권문제와 올림픽 개최 문제를 연결시킨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문제없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