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권용원 "공직 진출도, 기업인 변신도… 미치도록 하고 싶어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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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
벤처거품 붕괴로 고난의 행군… '버티면 이긴다'가 맞더군요
벤처거품 붕괴로 고난의 행군… '버티면 이긴다'가 맞더군요
“권용원 산업자원부 산업기술개발과장은 기술의 시대 21세기를 이끌어갈 뉴리더로 손꼽힌다.”
한국경제신문은 2000년 1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맞아 ‘밀레니엄을 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시리즈로 연재했다. 전도유망한 각계 인재들의 포부와 각오를 들어보는 기획이었다. 기술정책의 뉴리더로 소개됐던 39세의 권 과장은 18년이 흐른 지금 완전히 다른 분야의 리더가 됐다. 그는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업계를 대표하는 금융투자협회 회장이다.
권용원 회장(57)을 서울 북촌 한옥마을 인근 한정식집 한뫼촌에서 30일 만났다. 그가 10여 년째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찾는 집이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나온다. 커다란 항아리가 줄을 서 있다. 권 회장을 만난 때는 해가 막 질 무렵이었다.
1년여 만에 합격한 기술고시
이 식당의 단골이 된 이유를 먼저 물었다. “맛이 없어서….”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날그날 제철 채소를 내주는데,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간을 약하게 해요. 담백하고 삼삼한 맛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날은 들깨가지찜과 더덕구이를 비롯해 산채 나물 다섯 종류가 나무그릇에 담겨 올랐다. 두릅과 문어가 초장과 함께 나왔고, 싸리나무 채반에는 연뿌리튀김과 파튀김이 담겼다. 불고기와 조기구이까지 오르자 그는 동석한 기자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가지찜은 부드러운 식감이 제대로 살아 있었다. 더덕구이는 매운맛 없이 진한 더덕 향을 뿜어냈다. “자극적인 맛이 전혀 없어서 올 때마다 자극적인 감자튀김을 함께 달라고 해요. 하하하.”
권 회장은 자신의 이력을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보기술(IT)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증권맨’으로 다시 한 차례 변신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80학번인 권 회장은 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반도체 전공)를 받았다. 동기 가운데 공무원이 된 사람은 권 회장밖에 없었다.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교수나 대기업 직원이 됐다. 동기들 사이에서 그는 별종 취급을 당했다. “석사 1년차에 어딘가에서 특강을 들었는데, 공직의 의미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그때 무언가에 홀렸는지, 특강을 들은 직후부터 공무원이 미친듯이 하고 싶어졌어요. 할 수 있는 게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피가 끓었던 것 같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듬해인 1986년 기술고시(21회)에 합격했다.
소프트웨어산업에 병역특례 도입
합격 직후 권 회장은 옛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전자전기공업국에 배치받아 반도체 담당 사무관이 됐다. 당시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공급 과잉으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면서 반도체업계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에까지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던 시절이었죠. 제가 사무관으로 반도체 정책 실무를 담당하면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이 밀어붙였다 싶지만 그때는 상황이 정말 심각했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도움과 몇몇 행운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공급과잉은 극적으로 해소됐다. 미국은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일본에 생산량 감축을 요구했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발생해 일부 반도체 라인이 가동을 멈췄다. 반도체 가격이 치솟으면서 권 회장은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정책 추진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는 ‘일벌레’가 됐다. 한창때는 정부과천청사 앞 호텔 12층에 방을 잡아놓고 일했다. 소프트웨어산업이 병역특례업종으로 지정된 것도 권 회장의 ‘작품’이다. “소프트웨어산업 종사자들이 상당히 자유롭게 일하는 특성이 있거든요. 소프트웨어산업을 병역특례업종으로 지정하는 걸 주도하고 병무청으로부터 괜한 짓을 해 병역특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키우게 생겼다는 항의도 많이 받았지요.”
공무원 시절 무용담이 한창 이어지는 와중에 감자튀김이 나왔다. 지서윤 한뫼촌 사장은 “권 회장은 올 때마다 감자튀김을 찾는다. 예약하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놓는다”고 귀띔했다. 한뫼촌은 감자튀김 맛도 담백했다.
권 회장은 감자튀김을 먹으며 옛 상공부 공무원들에 대한 공직사회의 선입견에 관해 얘기를 풀어놨다. “산업 진흥이 주업무인 부처다 보니 일각에서는 ‘업계의 앞잡이’라는 말까지 하더군요. 상공부 공무원이 산업을 못 키우면 그게 비판받을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을 잘하고 있구나’ 하고 좋게 생각했습니다.”
키움증권 사장으로 9년 재직
공직에 몸담은 이후 15년간 승승장구하던 권 회장은 2000년 갑자기 사표를 냈다. 기술고시 출신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꼈고, 무엇보다 ‘직접 기업으로 뛰어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관료생활을 그만뒀습니다. 공무원이 될 때와 비슷하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미친듯이 사업을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공대를 나와서 기술 이해가 빠르고, 국가 정책의 흐름까지 꿰뚫고 있으니 기업에 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대기업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보자”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다우기술로부터 영입제안을 받았다. 다우기술은 ‘벤처 1세대’ 정보기술(IT) 기업이다. 권 회장은 구체적인 근무조건도 정하지 않고 입사를 결정했다.
기업인 생활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자 벤처회사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다우기술과 계열사들을 총괄하는 구조조정본부장 역할을 맡았는데 죽도록 고생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하지만 임직원에게는 티를 안 냈어요. 되레 큰소리를 뻥뻥 쳤습니다. 이번 위기만 버티면 삼성은 몰라도 삼성 계열사 하나는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정말로 재무상황이 호전되더니 키움증권을 세울 힘까지 생겼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생의 비극은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 직전에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게 됐어요.”
권 회장의 호언과 달리 삼성 계열사를 인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서울 여의도 삼성생명빌딩을 사서 키움증권 사옥으로 쓰고 있다.
권 회장은 2009년부터 올해 2월 금융투자협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키움증권 사장을 맡았다. 이 기간 지점 하나 없는 온라인증권사 키움증권을 증권업계 11위(자기자본 기준)에 올려놨다. 주식위탁매매(브로커리지) 분야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최고경영자(CEO)로 보낸 기간만 14년.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이 연임을 포기하자 권 회장은 협회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68.1%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금융투자업계를 이끄는 협회를 앞으로 그는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 “금융투자협회는 업계 발전을 위해 정부에 다양한 정책을 요구합니다. 임직원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금융투자업계의 앞잡이’라고 불러도 창피하게 생각할 게 전혀 없다. 타당성이 있고 특정 업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렇게요.”
△1961년 서울 출생
△1980년 서울 광성고 졸업
△1984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6년 기술고시 21회
△1987년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1999년 산업자원부 산업기술국 산업기술개발과 과장
△2000년 다우그룹 전략경영실장
△2004년 인큐브테크 사장
△2007년 키움인베스트먼트 사장
△2009년 키움증권 사장
△2018년 제4대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 "국내 증권업계 자기자본 증대 글로벌시장 도전의 場 열어"
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은 “한국 금융투자업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면서도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불과 7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큰 증권사의 자기자본이 2조원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8조원을 넘었고, 2년 뒤에는 10조원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며 “증권사 사이에 증자 경쟁이 붙으면 외국 증권사와 직접 경쟁이 가능한 규모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회사는 규모가 커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는 게 권 회장의 설명이다.
권 회장은 세계 최대 증권사 골드만삭스와의 경쟁을 거론했다. “자기자본 100조원대 글로벌 증권사와 2조원대 국내 증권사가 나란히 경쟁한다는 게 너무 먼 이야기 같지만 자기자본 100조원과 10조원 증권사 간 경쟁이라면 도전해볼 만하다”며 “한국의 전자산업이 이뤄낸 성과를 금융투자업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권용원 협회장의 단골집 한뫼촌
단백한 제철 나물소반 유명… 더덕구이·들깨가지찜 일품
서울 종로구 재동에 있는 한뫼촌은 맞은편 헌법재판소 직원들은 물론 광화문에 있는 관료들도 자주 찾는 채식 위주의 한정식 집이다. 이곳은 1930년대 최고의 무용수로 꼽혔던 최승희 씨가 나고 자란 집터로도 유명하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점심 정식 가격은 1만9800~2만9800원, 저녁 정식은 3만5000~4만1800원이다. 생선구이와 죽순 채 볶음, 더덕구이, 제철 산채 나물 등을 담은 나물소반이 유명하다.
들깨가지찜도 이곳의 대표 음식 중 하나로 꼽힌다. 적당히 달면서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즐겨 찾는다. 반찬은 정해져 있지 않고 매일 바뀐다. 모든 음식에 간을 많이 하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이 난다.
박종서/은정진 기자 cosmos@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은 2000년 1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맞아 ‘밀레니엄을 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시리즈로 연재했다. 전도유망한 각계 인재들의 포부와 각오를 들어보는 기획이었다. 기술정책의 뉴리더로 소개됐던 39세의 권 과장은 18년이 흐른 지금 완전히 다른 분야의 리더가 됐다. 그는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업계를 대표하는 금융투자협회 회장이다.
권용원 회장(57)을 서울 북촌 한옥마을 인근 한정식집 한뫼촌에서 30일 만났다. 그가 10여 년째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찾는 집이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나온다. 커다란 항아리가 줄을 서 있다. 권 회장을 만난 때는 해가 막 질 무렵이었다.
1년여 만에 합격한 기술고시
이 식당의 단골이 된 이유를 먼저 물었다. “맛이 없어서….”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날그날 제철 채소를 내주는데,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간을 약하게 해요. 담백하고 삼삼한 맛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날은 들깨가지찜과 더덕구이를 비롯해 산채 나물 다섯 종류가 나무그릇에 담겨 올랐다. 두릅과 문어가 초장과 함께 나왔고, 싸리나무 채반에는 연뿌리튀김과 파튀김이 담겼다. 불고기와 조기구이까지 오르자 그는 동석한 기자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가지찜은 부드러운 식감이 제대로 살아 있었다. 더덕구이는 매운맛 없이 진한 더덕 향을 뿜어냈다. “자극적인 맛이 전혀 없어서 올 때마다 자극적인 감자튀김을 함께 달라고 해요. 하하하.”
권 회장은 자신의 이력을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보기술(IT)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증권맨’으로 다시 한 차례 변신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80학번인 권 회장은 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반도체 전공)를 받았다. 동기 가운데 공무원이 된 사람은 권 회장밖에 없었다.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교수나 대기업 직원이 됐다. 동기들 사이에서 그는 별종 취급을 당했다. “석사 1년차에 어딘가에서 특강을 들었는데, 공직의 의미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그때 무언가에 홀렸는지, 특강을 들은 직후부터 공무원이 미친듯이 하고 싶어졌어요. 할 수 있는 게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피가 끓었던 것 같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듬해인 1986년 기술고시(21회)에 합격했다.
소프트웨어산업에 병역특례 도입
합격 직후 권 회장은 옛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전자전기공업국에 배치받아 반도체 담당 사무관이 됐다. 당시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공급 과잉으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면서 반도체업계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에까지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던 시절이었죠. 제가 사무관으로 반도체 정책 실무를 담당하면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이 밀어붙였다 싶지만 그때는 상황이 정말 심각했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도움과 몇몇 행운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공급과잉은 극적으로 해소됐다. 미국은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일본에 생산량 감축을 요구했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발생해 일부 반도체 라인이 가동을 멈췄다. 반도체 가격이 치솟으면서 권 회장은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정책 추진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는 ‘일벌레’가 됐다. 한창때는 정부과천청사 앞 호텔 12층에 방을 잡아놓고 일했다. 소프트웨어산업이 병역특례업종으로 지정된 것도 권 회장의 ‘작품’이다. “소프트웨어산업 종사자들이 상당히 자유롭게 일하는 특성이 있거든요. 소프트웨어산업을 병역특례업종으로 지정하는 걸 주도하고 병무청으로부터 괜한 짓을 해 병역특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키우게 생겼다는 항의도 많이 받았지요.”
공무원 시절 무용담이 한창 이어지는 와중에 감자튀김이 나왔다. 지서윤 한뫼촌 사장은 “권 회장은 올 때마다 감자튀김을 찾는다. 예약하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놓는다”고 귀띔했다. 한뫼촌은 감자튀김 맛도 담백했다.
권 회장은 감자튀김을 먹으며 옛 상공부 공무원들에 대한 공직사회의 선입견에 관해 얘기를 풀어놨다. “산업 진흥이 주업무인 부처다 보니 일각에서는 ‘업계의 앞잡이’라는 말까지 하더군요. 상공부 공무원이 산업을 못 키우면 그게 비판받을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을 잘하고 있구나’ 하고 좋게 생각했습니다.”
키움증권 사장으로 9년 재직
공직에 몸담은 이후 15년간 승승장구하던 권 회장은 2000년 갑자기 사표를 냈다. 기술고시 출신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꼈고, 무엇보다 ‘직접 기업으로 뛰어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관료생활을 그만뒀습니다. 공무원이 될 때와 비슷하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미친듯이 사업을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공대를 나와서 기술 이해가 빠르고, 국가 정책의 흐름까지 꿰뚫고 있으니 기업에 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대기업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보자”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다우기술로부터 영입제안을 받았다. 다우기술은 ‘벤처 1세대’ 정보기술(IT) 기업이다. 권 회장은 구체적인 근무조건도 정하지 않고 입사를 결정했다.
기업인 생활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자 벤처회사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다우기술과 계열사들을 총괄하는 구조조정본부장 역할을 맡았는데 죽도록 고생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하지만 임직원에게는 티를 안 냈어요. 되레 큰소리를 뻥뻥 쳤습니다. 이번 위기만 버티면 삼성은 몰라도 삼성 계열사 하나는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정말로 재무상황이 호전되더니 키움증권을 세울 힘까지 생겼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생의 비극은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 직전에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게 됐어요.”
권 회장의 호언과 달리 삼성 계열사를 인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서울 여의도 삼성생명빌딩을 사서 키움증권 사옥으로 쓰고 있다.
권 회장은 2009년부터 올해 2월 금융투자협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키움증권 사장을 맡았다. 이 기간 지점 하나 없는 온라인증권사 키움증권을 증권업계 11위(자기자본 기준)에 올려놨다. 주식위탁매매(브로커리지) 분야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최고경영자(CEO)로 보낸 기간만 14년.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이 연임을 포기하자 권 회장은 협회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68.1%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금융투자업계를 이끄는 협회를 앞으로 그는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 “금융투자협회는 업계 발전을 위해 정부에 다양한 정책을 요구합니다. 임직원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금융투자업계의 앞잡이’라고 불러도 창피하게 생각할 게 전혀 없다. 타당성이 있고 특정 업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렇게요.”
△1961년 서울 출생
△1980년 서울 광성고 졸업
△1984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6년 기술고시 21회
△1987년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1999년 산업자원부 산업기술국 산업기술개발과 과장
△2000년 다우그룹 전략경영실장
△2004년 인큐브테크 사장
△2007년 키움인베스트먼트 사장
△2009년 키움증권 사장
△2018년 제4대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 "국내 증권업계 자기자본 증대 글로벌시장 도전의 場 열어"
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은 “한국 금융투자업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면서도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불과 7년 전만 하더라도 가장 큰 증권사의 자기자본이 2조원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8조원을 넘었고, 2년 뒤에는 10조원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며 “증권사 사이에 증자 경쟁이 붙으면 외국 증권사와 직접 경쟁이 가능한 규모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회사는 규모가 커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는 게 권 회장의 설명이다.
권 회장은 세계 최대 증권사 골드만삭스와의 경쟁을 거론했다. “자기자본 100조원대 글로벌 증권사와 2조원대 국내 증권사가 나란히 경쟁한다는 게 너무 먼 이야기 같지만 자기자본 100조원과 10조원 증권사 간 경쟁이라면 도전해볼 만하다”며 “한국의 전자산업이 이뤄낸 성과를 금융투자업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권용원 협회장의 단골집 한뫼촌
단백한 제철 나물소반 유명… 더덕구이·들깨가지찜 일품
서울 종로구 재동에 있는 한뫼촌은 맞은편 헌법재판소 직원들은 물론 광화문에 있는 관료들도 자주 찾는 채식 위주의 한정식 집이다. 이곳은 1930년대 최고의 무용수로 꼽혔던 최승희 씨가 나고 자란 집터로도 유명하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점심 정식 가격은 1만9800~2만9800원, 저녁 정식은 3만5000~4만1800원이다. 생선구이와 죽순 채 볶음, 더덕구이, 제철 산채 나물 등을 담은 나물소반이 유명하다.
들깨가지찜도 이곳의 대표 음식 중 하나로 꼽힌다. 적당히 달면서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즐겨 찾는다. 반찬은 정해져 있지 않고 매일 바뀐다. 모든 음식에 간을 많이 하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이 난다.
박종서/은정진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