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환율 이면 합의 논란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홈페이지에 한국과의 무역 협상 성과를 네 가지 항목에 걸쳐 게재했다. 그중 ‘환율 합의’라는 항목에 “… 평가절하와 환율 조작을 금지하는 조항에 대한 합의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우리 정부는 즉각 환율 협상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과 별개로 진행된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논란은 계속되고있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과 FTA 협상을 연계하겠다고 발언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의 환율정책 투명성 요구가 환율 주권을 침해하고 정당한 환율정책 수행에 차질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뉴스의 맥] 美, 한국을 지렛대로 중국과 '新플라자합의' 성과 노려
사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거의 만성적이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1990년에만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90년의 유일한 흑자도 우방들이 걸프전 참전 비용 일부를 분담한 것이 포함돼 나타난 기록상의 흑자였다. 그런데 비교적 관대하던 미국의 태도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인식 자체가 바뀌었다.

그의 곁에서 무역정책을 관리하는 피터 나바로 국장은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 교수 출신이다. 그는 수년 전 《중국에 의한 죽음》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은 미국의 핵심 기술을 조직적으로 탈취하고 있고 저임금을 통해 만든 제품을 미국에 대량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환율 조작을 통해 수출을 더욱 촉진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군사력을 증강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을 제압하려 들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국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나라는 바로 미국인 셈이다.

그는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백악관에 입성했다가 이 조직이 폐지되면서 무역제조업정책국장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최근 자유무역을 주장하던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경질되면서 나바로가 승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바로 국장과 상당 부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무역 불균형 문제에 대한 트위터 메시지를 하나 인용해보자. “우리의 바보 같은(foolish) 과거 지도자들은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을 통해 한 해 수천억달러를 벌어가도록 허용했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력 축적에 도움을 줬는데 이제 중국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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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화 결제 상하이 원유선물시장

중국은 최근 상하이에 원유선물시장을 개설하고 원유선물 계약을 도입했다. 주지하다시피 석유 결제는 99% 이상이 미국 달러로 이뤄진다. ‘달러’라는 단어 앞에 석유를 의미하는 ‘페트로(petro)’가 붙은 ‘페트로 달러’라는 단어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을 상징한다. 그런데 상하이선물시장에서 원유선물은 위안화로 결제된다. 평소에는 금전 결제만 이뤄지다가 만기 시점에서 원유 실물이 위안화로 결제되는 시장이 개설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공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중국이라는 호랑이가 “왜 달러만 기축통화냐, 위안화도 기축통화로 간다”고 포효하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미국의 중국 견제 정책은 대미(對美) 흑자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대미 흑자국은 미국을 이용해 돈만 벌려고 하는 나쁜 나라인 셈이고, ‘대미흑자’ ‘환율 조작’ ‘기술 탈취’는 미국에 죄를 저지르는 나쁜 행위다.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 전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은 기술 이전을 강요하고 사이버 도둑질을 했다. 미국 연간 무역적자 8000억달러의 절반이 넘는 5040억달러가 대중(對中) 무역적자다”는 발언까지 했다. 중국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한국도 손봐야 할 대상이다. 한국부터 ‘대미흑자’를 줄이고 ‘환율 조작’을 못 하도록 해야 이를 발판으로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1944년 시작된 소위 브레턴우즈 체제 아래에서 미국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로 부상했다. 이 체제 아래에서 한국 같은 비(非)기축통화국은 무역 결제와 외환보유액 축적을 위해 처절한 달러 확보 경쟁을 해야 한다. 외환보유액의 경우 과거에는 3개월분 교역액 정도면 적절하다고 봤는데 자본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변덕스러운 해외 자본이 언제 어느 때 빠져나갈지 알 수 없다 보니 외환보유액을 늘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늘리려면 달러를 사들여야 한다. 외환보유액 증가와 환율 조작은 쌍둥이 형제다. 모든 외환보유액은 환율 조작의 결과물이라는 누명(?)도 가능해진다.

환율 조절 일괄 타결은 어려울 것

중국은 2008년 글로벌 위기 직전 3조달러가 넘는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었다. 자국 국내총생산(GDP)의 60%를 넘는 엄청난 외환보유액에 대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비판은 칭찬으로 돌변했다. 앞을 내다봤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지나치게 많은 것 같던 외환보유액은 중국으로 하여금 위기를 피하게 해준 구세주가 됐고 그 이후 중국은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구축한 국제금융체제 아래에서 비기축통화국의 흑자와 외환보유액은 국가 생존과 직결된다. 적자를 내고 외환보유액이 모자라면 경제위기가 코앞에 닥친다. 비기축통화국의 흑자와 외환시장 개입에 비판만 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처럼 회담을 통한 환율 조정 일괄 타결 방식을 선호하겠지만 지금 목표가 되는 중국의 위안화는 당시의 일본 엔화와 달리 기축통화가 아니다. 국제 결제통화가 아닌 통화에 대해 다자협상을 하려면 다른 신흥국도 대거 참여해야 할 텐데 이 경우 일괄 타결이 힘들다. 결국 미국은 대표적 대미흑자국인 한국과의 협상을 통한 결과를 가지고 중국을 압박함으로써 신(新)플라자합의 수준의 성과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미흑자는 한국 흑자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도 흑자를 내고 있고, 내야 하는 상황이다. 대미흑자 때문에 환율이 지나치게 조정되면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도 영향을 주면서 전체 흑자가 줄어들고 우리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 대미흑자와 환율을 최대한 분리해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의 수입을 미국 수입으로 전환하면 대미흑자는 줄지만 전체 흑자는 변동이 없다.

對美 흑자 자율 감출도 필요

협상은 투트랙이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환율 정책 투명성 등에 관한 요구는 최대한 수용하고 대미흑자를 자율 감축하는 동시에 미국이 만든 국제금융질서에서 수지흑자와 외환보유액이 생명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통상 압력을 최대한 완화해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700억달러 수준의 해외 자본이 유출됐을 때 한국은 미국과의 300억달러 통화스와프를 통해 위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바 있다.

대미관계가 과거보다 악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현 상황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다. 환율 문제 등에 대한 효율적 대응과 함께 좀 더 적극적으로 전반적인 대미관계 복원과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기축통화국으로서 기축통화국과의 관계를 좀 더 전향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