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김현종,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내 깊은 곳에서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배 12척이 안 된다.”

전자는 2016년 2월 당시 김현종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더불어민주당 입당 인사에서 한 말이다. 후자는 2017년 8월 “현재 통상교섭본부 인력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 대응할 수 있느냐”는 국회 질문에 대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대답이다. 이순신 장군의 배 12척은 이렇게 인용됐다.

김 본부장은 한·미 FTA 개정 및 철강 관세협상 결과 브리핑에서도 역사적 자평을 내놨다. “꿀릴 것 없는 협상판이었다”며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뒤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있었고, 내 뒤엔 우리 국민이 있었다”고 했다. “덩케르크 전투에서 처칠의 항전 결정이 성공한 데는 영국 국민이 있었고, 고려 서희 장군 담판이 성공한 배경엔 백성의 결기가 뒷받침돼 있었다”고도 말했다.

토머스 칼라일도 울고 갈 영웅사관이다. 분명한 건 이 정부 들어 통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불안감을 감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부터 그랬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FTA 재협상을 공식화했지만 청와대는 “재협상 합의는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가 백악관에 처음 가 본 사람처럼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잠시, 개정 협상은 현실이 됐다.

김 통상교섭본부장은 “당당하게 협상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FTA 폐기 불사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가 부랴부랴 대응에 부심하는 사이 미국의 전략은 무역확장법 232조 철강 공세 등 FTA 틀을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

김 본부장은 협상 결과 브리핑 직전 국무회의에서 “미국에 ‘빛 좋은 개살구’만 주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 자동차·철강 업체가 수긍할까”, “미국은 바보였나”, “통상전문가들은 왜 C+(그것도 대학원 학점 기준으로)밖에 못 준다고 하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관세보다 더한 폭탄인 ‘환율 합의 포함’이 미국으로부터 들려왔다. 김 본부장은 브리핑에서 환율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과 관련, “축구 뛰고 온 선수에게 야구에 대해 왜 얘기하지 않느냐는 질문 같다”고 했다. 최소한 “한·미 통상문제가 FTA 틀을 넘어섰음을 이해해 달라. 환율은 중요하다. 별도 협상이지만 정부 내에서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말할 줄 알았다. 기대는 빗나갔다. 그는 환율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경계하는 듯하다.

환율 협상이 기획재정부 소관인 걸 몰라서 나온 문제 제기가 아니었다. 김 본부장이 말끝마다 들먹이는 국민에게 정부는 하나다. 더구나 그 자신이 국무회의, 대외경제장관회의 참석자다. 그의 말대로면 미국은 FTA, 철강, 환율, 심지어 북핵에 대(對)중국 관계까지 ‘패키지 연계전략’을 구사하는데 한국은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김 본부장은 2016년 3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차이점’이라는 블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가지고 (한·미 FTA) 재협상에 임한 결과는 야당의 폐기 주장에 빌미를 제공했다.” 누가 노무현 정부 FTA 협상을 지지하고, 누가 처음부터 반대하며 줄기차게 폐기를 주장해 온 건지 세상은 다 안다.

10년 전 김현종과 지금의 김현종은 달라 보인다. 역사의 굴곡이 김 본부장을 바꿔놨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현재 대한민국 통상교섭을 책임진 본부장이라는 사실이다. 미·중 무역갈등 먹구름까지 몰려 올 판이다. 김 본부장이 진중함을 갖든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정치적 야망 때문이라면 지금이라도 그 길로 가든가 해야 하는 게 아닌지. 조직과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할 통상외교가 더 망가지기 전에 말이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