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근로시간 단축, 싫어할 사람 있겠나
미국에 잠시 머물 때 얘기다. 이웃에 한국인 가족이 살았는데, 남편 A씨는 거의 보이지 않고 부인이 두 아이를 힘겹게 건사하는 모습이 늘 안쓰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산책 나온 A씨를 만났다. 궁금했던 터라 다짜고짜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시냐고.

그는 미국 기업에 스카우트된 한국 변리사였다. 연봉도 괜찮고 아이들 교육에도 좋을 것 같아 선뜻 취업 이민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취업 첫날부터 후회막급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했고 주말도 쉬지 못했다. 휴가조차 반납해야 했다니 말이다. 미국이니 시간 외 수당은 제대로 줄 것 아니냐고 물었다가 모르는 소리 말라는 그의 하소연에 꽤 오랜 시간 귀를 빌려줘야 했다.

미국에는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exemption·제외)’이라는 제도가 있다. 고액 연봉의 화이트칼라는 아무리 장시간 근무해도 초과근무 수당을 받지 못하는 제도다. 근로 시간이 아니라 성과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연봉이 얼마나 되기에 고액이라고 할까. 생각처럼 높지 않다. 부자 지역이라는 캘리포니아주가 4만7500달러다. 우리 돈으로 약 5000만원이다. 절반 이상의 화이트칼라가 대상이라는 얘기다.

물론 성과를 채우면 만사형통이다. 하지만 성과 관리가 장난이 아니다. 근무 시간 관리부터 타이트하다. 점심시간이 따로 없어 근무하면서 햄버거로 때우는 직장이 적지 않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업무상 전화가 아닌 통화도 근무 시간에서 뺀다. 한국 근무 방식으로는 도무지 맞출 수 없었다는 게 A씨의 설명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그러냐고 물었다. 답은 예상 밖이었다. 처음에는 그랬지만 미국 방식에 익숙해지니 훨씬 낫더라는 것이다. 성과만 채우면 자신의 생활을 즐길 수 있다며 말이다.

A씨를 문득 떠올린 건 일본 정부가 며칠 전 이 제도를 본뜬 ‘탈(脫)시간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소위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의 세 축 가운데 하나다. 일단 연봉이 1075만엔(약 1억700만원)을 넘는 전문직은 노동 시간 규제에서 제외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다. 제도 논의 초기 400만엔(약 4000만원)과 다양한 직역이 적용 기준으로 거론됐다니 시작만 되면 적용 범위도 빠르게 확대될 것이라는 얘기다.

일본 정부가 이 제도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의 목표를 생산성 제고에 두고 있어서다. 근로 시간 단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2020년까지를 ‘생산성 혁명 집중 기간’으로 정한 일본이다. 최종 목표는 생산성을 연평균 2%씩 올리는 것이다. 과거 5년 실적의 두 배가 넘는 속도다.

생산성 제고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제 지원이나 규제 완화에도 적극적이다. 법인세를 낮추기로 한 데 이어 첨단기술을 사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기업에는 더 깎아 줘 30%인 실효세율을 20%까지 낮아지도록 했다. 중소기업 생산성 제고를 위해서는 고정자산세 부담 감면 조치도 강구하기로 했다.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 주는 ‘샌드박스’ 법안도 과감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목표는 오로지 근로 시간 단축이다. 근로 시간을 줄이면 보완책이 없어도 저절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정부다.

일본이 도입했다는 탈(脫)시간급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공공 부문 성과연봉제부터 폐기돼서다. 일본은 우리보다 연장 근로 시간이 연 100시간이 더 많은데도 노사 합의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게 했지만 우리는 주당 12시간을 넘으면 무조건 사업주가 처벌된다. 특례업종도 크게 줄었다.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는 논의 자체가 2022년 말까지로 미뤄졌다. 법인세는 거꾸로 올리고 규제는 여전하다.

한국 직장인은 하루 11시간 회사에 머물지만 생산적인 일에 쓰는 시간은 5시간32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절반이다. 이런 생산성에 근로 시간만 줄어들면 결과가 어떻겠는가.

생산성이 뒤따라 주지 않는 근로 시간 단축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거꾸로 고용 감소와 실업 악화를 부채질할 뿐이다. 노동계층을 끔찍이 생각한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조차 “생산성이 전부는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이 전부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임금피크제 없는 정년 연장과 산입 범위 조정 없는 최저임금 인상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