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줄면… 히든챔피언도 범법자 됩니다"
인천 주안공단에 있는 화장품 용기업체 연우. 본관 1층 로비에는 ‘1억달러 수출탑’ 상패가 놓일 자리가 마련돼 있다. 오는 7월1일 상을 받을 것이란 기대로 자리를 잡아뒀다. 그럴 만했다. 연우는 ‘히든챔피언’ 기업이다. 로레알 랑콤 등 세계적 화장품회사들이 연우가 제조한 용기를 쓴다. 아모레퍼시픽 등 한국 업체는 물론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가 넘는다. 하지만 이제 7월1일을 기다리는 직원은 없다. 이 상을 받는 날 ‘근로시간 단축제’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법이 시행되면 연우는 해외에서 수주한 물량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1550명의 직원이 주당 60시간 2교대로 납기를 맞추고 있지만, 근로시간을 줄이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중현 연우 대표(60·사진)는 근로시간 단축법이 통과된 뒤 수개월을 고민했다. 그리고 지난 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소·중견기업 경영애로’라는 청원을 냈다. 코스닥 상장사 대표가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는 얘기를 들을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기 대표는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외 시장 확대를 포기하거나, 법을 어기고 지금처럼 조업해 범법자가 되는 길밖에 없어 청와대에 호소했다”고 말했다.

용기산업의 특성 때문이다. 플라스틱 원재료를 가열한 뒤 녹여 거푸집에 넣고 냉각해 제품을 생산하는 사출산업은 장치산업이다. 하루평균 20시간을 돌려야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 그는 “주당 2교대 60시간을 3교대 40시간으로 바꿀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근로시간과 함께 임금이 줄어들면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고 했다. 설비를 늘리는 것도 쉽지 않다. 생산 설비를 20%가량 확충해야 하지만 수도권 공장 규제로 증설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 대표가 청와대 청원을 한 것은 연우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근로시간 단축이 제조업의 기반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플라스틱 사출산업이 흔들리면 금형업까지 타격 받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업체에 전체 시장을 내줄 우려가 있다”고 했다. 고졸 창업신화를 쓴 히든챔피언은 범법자와 글로벌 시장 포기의 기로에 서 있다.


연우는 2012년 ‘월드클래스 300기업’(산업통상자원부)과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사업 대상’(수출입은행)에 선정됐다. 2016년 ‘대한민국 우수특허 대상’을 받는 등 기술력도 뛰어나다. 올해 예상 매출(2650억원)의 45%가량이 로레알 등 글로벌 기업에서 나온다. 기술력은 고용 창출로 이어졌다. 연우는 정규직과 1차 협력사(1200명)까지 합쳐 27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정부 정책도 잘 따랐다. 최저임금 인상에 맞춰 급여체계를 개선하는 등 이익을 직원들에게 더 배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현장에 뛰어들어, 그 경험으로 창업한 기중현 대표가 현장 근로자의 애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 대표도 근로시간 단축에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청와대에 청원을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직원들을 붙잡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우는 생산직 직원들에게 주말 근무와 연장 근무 등을 통해 사실상 70시간분(40시간+20×1.5)의 시급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3교대로 전환되고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으로 줄어들면 실질임금이 지금보다 40%가량 줄어들게 된다. 생산직이 주로 경력단절 주부 사원이어서 임금 감소 때문에 300인 이하 회사 또는 다른 업종으로 이직할 것을 기 대표는 걱정하고 있다. 연우의 한 생산직 여성은 “일부 직원은 특근을 많이 하는 업종으로 옮기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우는 신규 채용이 힘들고 중소기업으로 분류가 안 돼 외국인도 채용할 수 없다. 기 대표는 “해외로부터 대량의 연간 수주계약을 맞추기 위해 주말까지 가동해도 납기 맞추기가 빠듯하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업종의 특성을 고려해 순차적으로 유연하게 시행해달라는 것이다. 사출업은 2인 2교대로 주당 60시간을 근무하는 구조다. 미국과 일본의 플라스틱 사출업체도 2교대 체제로 작업하고 있는 형편이다. 시행 시기를 2년간 연기하거나, 3D 업종을 기피하는 현실을 고려해 중견기업이라도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아니면 주 52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하되 업종에 따라 해당 직종 근무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추가 8시간 한도 내에서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게 기 대표의 요구다.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