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이 꿈에 본 내용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꿈에 본 내용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즉위했던 1453년 10월10일. 의금부도사 신선경이 군사 100명을 이끌고 가 안평대군과 아들 이우직을 체포했다. 아들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된 안평대군은 체포된 지 8일 만에 교동도에서 사약을 마시고 삶을 마감했다. 서른다섯, 아까운 나이였다. 이렇게 동생 안평대군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마침내 조카인 단종마저 죽이고 세조가 됐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던 세종의 아들 사이에 벌어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비극이다.

수양의 겁박으로 단종이 발표한 교서는 이랬다. ‘간신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 용과 결탁하여 친당을 널리 심고 중외에 거점을 분담하고는 죽을 각오의 무사들을 몰래 양성하고 변방의 무기를 가만히 들여와 불궤(不軌·반역)를 도모했다.’ 안평대군은 정말로 반역을 꾀했을까. 그럴 만큼 권력욕이 넘치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정치의 희생자였을까.

[책마을] 계유정난에 스러진 안평대군… 詩會가 화근이었나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안평》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해 안평대군의 삶을 담아낸 평전이다. 1985년 일본 덴리(天理)대 덴리도서관 서고에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안평대군의 글과 선비들의 시를 붙여 엮은 ‘몽유도원도시화권’을 처음 만난 심 교수가 안평의 삶을 추적해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20년 만에 평전이 완성됐다.

익히 알려진 대로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걸출한 인재였다. 20대 초 왕안석의 시를 감상하면서 시학의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시에 능해 집현전 학사 등 문인, 지식인들의 네트워크가 탄탄했다. 1442년 세종에게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을 땐 문신들에게 기념시를 지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글씨도 탁월했다. 송설체(조맹부체)를 배워 활달하면서도 우아한 귀족적 필체를 구사했다.

지적 역량도 인정받았다. 학문, 문학, 출판을 국가경영의 중심에 뒀던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각종 국가사업의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겼다. 그 결과 안평은 훈민정음 창제, ‘동국정운’과 ‘용비어천가’ 등 정음 문헌의 편찬에 두드러지게 기여했다. 불교철학에도 밝아 왕실의 안녕을 위한 불사(佛事)를 수양대군과 함께 주관하는 일이 많았고, 불경 편찬이나 제작에도 참여했다.

안평은 또한 엄청난 컬렉터였다. 신숙주가 세종 27년에 안평이 소장한 그림에 대해 적은 ‘화기(畵記)’에 따르면 안평은 다섯 시대에 걸쳐 화가 35명의 산수화 84종, 조수초목화 76종, 누각인물화 29종, 글씨 33종 등 총 222축을 소장했다고 한다.

지적 능력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안평대군은 문사(文士)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일이 많았다. 1447년 무릉도원의 이상향에 노니는 꿈을 꾼 안평은 안견에게 몽유(夢遊)의 인상을 그리게 하고 ‘몽유도원도’라 이름 붙였다. 또한 스스로 그 내용을 ‘도원기’로 지었고, 이를 문신과 승려들에게 보여준 뒤 시와 산문으로 짓게 했다. ‘몽유도원도시화권’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안평은 또 33세 때 몽유의 인상과 부합하는 창의문 밖 부암동에 무계정사를 짓고 시모임을 자주 열었다.

비극은 왕자인 그의 다재다능함에서 비롯됐다. 거듭되는 시회는 정치적 결속의 장으로 간주됐다. 저자는 “정치인과 예술가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 예술 모임은 곧 정치적 세력화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정권에 욕심이 있는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의도적으로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권력 기반을 굳혀나가는 빌미가 됐다고 해석했다.

안평대군에겐 정말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 저자는 안평대군이 반역의 음모를 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저자는 “계유정난의 경과를 서술하는 단종실록의 기록은 날조물의 집적”이라며 “단종실록 편수자들은 국정과 관련 없는 안평대군의 언행을 날짜에 맞춰 안배하고, 악의적인 인물 평가를 부기했다”고 강조했다.

수양대군이 한 살 아래 동생인 안평을 죽인 데에는 열등감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한다. 수양대군도 학문적 조예가 만만찮았지만 한시만은 안평을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안평을 죽인 수양대군이 안평과 관련된 모든 기록물을 없애버린 것도 이런 열등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심 교수는 시와 그림과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의 35년 삶에 대해 “꿈속에 노니는 몽유라 규정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예술 모임이 권력행위로 간주됐던 시대, 국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대군의 행위는 실제 목적이야 어떻든 그 자체가 권력의 현시로 간주됐고, 이것이 안평대군의 비극이 지닌 진정한 의미”라고 설명했다.

평전은 파편처럼 흩어진 자료를 모아 안평대군의 35년 삶을 끝과 시작, 수학 시기, 불교사상의 습득, 지성의 정화가 반영된 출판 업적, 예술혼의 방출, 정치적 좌절과 죽음 등으로 정리했다. 본문만 1100쪽을 넘는 책 두께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책에 인용된 방대한 시문들을 적당히 취사선택한다면 견딜 만하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