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반도체 핵심기술 정보공개를 우려한다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은 가전장인(家電匠人)이다. 고졸신화의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한 그는 세탁기 설계실에서 숙식하면서 모든 부품을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며 세탁기의 원리를 익혔다고 한다. 그 후에도 생활가전을 모조리 뜯어보고 조립하며 익힌 일화는 유명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공짜로 비법을 내주진 않는다. 그렇기에 과거 일본의 성장에도, 그 일본을 따라잡은 한국의 저력에도 이런 선배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조 부회장의 일화를 소개한 건 최근 걱정스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지난 2월1일 대전고등법원이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에 삼성전자 아산캠퍼스의 작업환경측정 결과보고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 산업 현장의 공정 정보를 담은 ‘작업환경 측정보고서’ 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일 테지만, 기업의 생존권 차원에서 영업기밀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 삼성전자는 고용노동부가 공개하기로 한 내용 중 ‘공정별 화학물질 사용 실태’와 ‘측정위치도’ 등이 영업비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개하기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피해 당사자 외에 시민단체나 언론 등 제3자에게까지 보고서를 공개하는 것은 과한 조치란 주장이다. 일리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안이 후공정에 해당하는 삼성전자 온양공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란 점에 있다. 벌써 공정에 대한 정보공개 요구의 불똥이 삼성SDI뿐만 아니라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SK이노베이션 등으로 튀고 있다.

필자의 걱정은 특정 기업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경제구조상 대표기업이 무너지면 국민경제에 대한 타격이 크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우리나라 유가증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21.6%, 3.8%(4월12일 기준)로 전체의 4분의 1에 이른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세계 시장에서 18위다. 국내 20대 기업이라고 해도 그 규모가 엄청난데 세계 20대 기업이라 하니 그 규모가 가히 와 닿지 않을 정도다. 그런 기업이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 140년 장수기업이자 세계 최강자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이 무너지고 있다. 한때 반도체와 가전시장의 강자였던 일본은 한국에 따라잡혔다. 이제 한국이 그 자리에 올라섰지만 중국의 추격은 매섭기만 하다. 지난해 산업기술평가관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디스플레이, 바이오를 비롯한 주요 24개 산업의 한·중 기술격차는 0.9년에 불과했다. 항공·우주 분야 등은 우리보다 4년6개월 이상 앞서 있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일본 등의 경쟁기업들은 한국 선도기업의 인재영입은 물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생산비법을 빼가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장맛은 며느리도 몰라.”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터줏대감 고(故) 마복림 할머니가 1990년대에 출연한 TV광고의 유명한 대사다. 이번 정보공개 요구에 대해 삼성 측은 “어떤 공정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쓰는지 등 정보 하나하나가 다 기술 노하우”라고 호소했다. 장맛도 아니고 반도체 회사에 영업기밀을 공개하라는 요구는 세계 시장에서의 자리를 내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아닐까.

최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반도체 생산시설 배치 등 핵심 기술 공개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을 밝혔다. 산업 기술이 외국 경쟁 업체에 유출될 가능성을 주시하면서 반도체 생산 공정 내용까지 공개되는 것에 대한 삼성이나 SK 등의 걱정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니 한결 맘이 놓인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산업정책을 설계하는 첫 단계는 그 나라에 적합한 ‘발전비전’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했다. 중국의 추격이 거세지고 있는 지금, 정부가 우리 산업을 보호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산업의 발전 비전부터 고민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