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외팔이 경제학자들의 '민속경제학'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 환생한다면 적어도 “외팔이 경제학자(one-handed economist)는 어디 없냐”고 찾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on the other hand)’라며 부작용을 경고하는 경제학자가 거의 실종됐기 때문이다. 물론 ‘양팔 경제학자’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비판에 귀 막은 정부는 투명인간으로 여긴다.

요즘 차고 넘치는 게 ‘외팔이 경제학자’다. 대선 캠프마다 500~1000명씩 몰렸으니 폴리페서 아닌 교수를 찾기도 힘들다. 논공행상을 의식해 더 강도 높은 ‘친(親)정부 커밍아웃’도 부쩍 늘었다. “경제학자들조차 정치적으로 사고(思考)하며 입증 없이 주장만 난무한다”는 한 교수의 진단이 대학사회 현주소를 압축한다.

창조경제만큼이나 모호한 ‘소득주도 성장’을 비판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마차(일자리)를 말(경제성장) 앞에 둘 수 없다”고 지적했지만 정책당국자들은 한 귀로 흘렸다. 사실 그들부터가 외팔이 경제학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소득주도 성장의 첫 단추라 할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은 통계가 말해준다. 1분기 도소매·음식숙박업은 또 역성장(-0.9%)이었다. 지난 2, 3월 취업자 증가폭은 10만 명 선으로 1년 전의 3분의 1 토막이다. 여성 일용직이 1분기 10%(5만6000명)나 줄어든 이유는 최저임금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최저임금 충격이 아니란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고용 부진을 기저효과(작년 1분기 호조 영향)와 조선 구조조정 탓으로 돌렸고, 홍장표 경제수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보기 싫은 증거는 외면한 채 ‘최저임금 1만원’을 고수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7월부터 근로시간 단축 쇼크까지 겹치면 어쩔 셈인가.

현장 비명은 점점 커지는데 무슨 배짱인지 궁금하다. 그 답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힌트를 준다. “실용주의자도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인 경우가 많다. 일찍 드러나든 늦게 드러나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관념이다.”

경제정책의 뿌리를 캐보면 죽은 경제학자들의 아이디어 조합에 가깝다. 경제민주화는 국가 개입을 정당화한 케인스가, 부동산 정책은 토지를 불로소득으로 본 헨리 조지가, ‘공정과 정의’라는 모토는 분배철학자 존 롤스가 바탕이다.

최근 심상치 않은 일련의 대주주 규제책들도 마찬가지다. 실물을 질식시키는 ‘반(反)시장 반기업’ 정책에서 칼 폴라니를 만나게 된다. 정부가 헤지펀드의 공격을 빤히 보면서도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강행하는 배경이다. 드루킹의 ‘삼성 국민기업화’ 주장도 맥락이 다르지 않다.

폴라니는 공산권 몰락으로 좌표를 잃은 좌파진영을 매료시킨 원조 공동체주의 사상가다. 그는 역사적으로 삶의 방식은 호혜(원시사회), 재분배(고대·봉건사회), 시장교환(19세기)이 있는데 시장보다는 비시장경제(호혜, 재분배)가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고 봤다. 도덕적 연대감으로 고삐 풀린 시장의 질주를 막아야 공동체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도 논란이다. 경제현상을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라는 제로섬으로 보는 ‘민속경제학(folk economics)’에 이어 ‘민속 마르크시즘(folk Marxism)’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경제학자 아널드 클링이 명명한 이 용어는 마르크스의 자본가와 노동자 이분법처럼, 세상을 ‘억압자 대 피(被)억압자’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는 것이다. ‘갑을’과 같다.

외팔이 경제학자라면 민속 마르크시즘에 경도되기 딱 좋다. 하지만 경제현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일방적인 억압과 피억압도 아니다. 경제학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존재하기에 경제학자는 양팔을 가져야 한다. 완전무결한 이론이 없고 오류 없는 정책도 없다. 비판을 듣지 않고 비전도 실종되면 결과는 뻔하다.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정책당국자들의 결기가 강할수록 걱정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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