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필자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아시아 국장이 되고 스위스 제네바 사무실로 처음 출근한 날이었다. 영국 출신 비서가 “제네바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프랑스어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적십자 창시자이자 1901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장 앙리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회상》이었다. 뒤낭이 1859년 벌어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으로 신음하는 수만 명의 군인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과 인도주의적 가치를 생각하며 쓴 책이다.

뒤낭은 이 책에서 전시에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에게 보호와 간호를 제공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구호 단체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유럽 각국으로부터 호응을 얻어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창립됐다.

솔페리노 전투 이후 1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대전과 같은 참혹한 전쟁은 줄었지만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국가(IS) 테러 등 지구촌 곳곳에서 아직도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사회 양극화 등 사회적 문제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이에 과거에는 적십자 활동이 참혹한 전장에서 이뤄졌다면, 오늘날은 지구촌 곳곳에서 인도주의의 손길이 요구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적십자 봉사원과 직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어버이날로 더 많이 알려진 5월8일은 뒤낭의 생일이자 ‘세계적십자의 날’이기도 하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에서 올해 세계적십자의 날 캠페인 슬로건을 ‘스마일(Smile)’로 정했다. 이 슬로건은 인도주의 운동가들에게 도움을 받는 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누군가를 행복에 젖게 하는 것, 그래서 웃음 짓게 하는 일’은 적십자 활동의 이유며, 인도주의적 가치와도 연결된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질병과 슬픔이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강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은 웃음과 유머”라고 했다. 인도주의 정신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을 웃게 하는 일, 여기에서부터 생명 존중의 인도주의가 시작된다.

평화의 분위기가 한반도에 무르익어가는 요즈음이다. 다시 한번 적십자의 소중한 가치와 정신을 되새겨보며, 우리의 시대적 사명인 평화와 공존이 주변과 이웃, 사회와 나라 곳곳에 밝은 웃음처럼 번져나가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