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큰소리 친 産銀… 비토권 지키려 GM에 대폭 양보
산업은행이 지난 27일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본사에 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조건부투자확약서(LOC)를 발송했다. 올초부터 이어진 산은과 미국GM 간 한국GM 지원 협상이 큰 틀에서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산은과 미국GM이 앞으로 한국GM에 지원하는 규모는 총 71억5000만달러(약 7조6700억원)다. 이 중 미국GM은 64억달러(약 6조8600억원)를, 산은은 7억5000만달러(약 8100억원)를 부담하기로 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미국GM이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입하기로 해 산은이 협상을 잘한 것으로 비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산은이 처음 협상을 시작할 때 한 얘기와 달리 미국GM에 일방적으로 밀려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산은은 당초 한국GM에 투입하는 산은 자금을 5000억원 수준으로 점쳤다. 하지만 결과는 3000억원 이상 늘었다. 미국GM이 창원공장 업그레이드 등 시설투자비용을 요구한 점을 산은이 받아들인 결과다.

[현장에서] 큰소리 친 産銀… 비토권 지키려 GM에 대폭 양보
미국GM이 한국GM의 자본으로 투입하는 돈이 산은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미국GM이 지원하는 64억달러 중 28억달러(약 3조원)는 기존 대여금을 우선주로 출자전환하는 것이다. 산은이 ‘올드머니’라고 부른 돈이다. 미국GM이 붓기로 한 신규 자금은 36억달러(약 3조8600억원)다. 이 중 신규 출자는 8억달러(약 8600억원)에 그치고 나머지 28억달러(약 3조원)는 대출이다.

이 대목에서도 산은이 기존에 내세운 원칙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동걸 산은 회장은 미국GM과 같은 방식으로 신규 자금을 넣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GM이 대출, 산은이 출자로 신규 자금을 내놓을 경우 우선변제 순위에서 미국GM에 밀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다. 하지만 미국GM이 신규 자금 지원 방식에서 출자와 대출을 섞은 반면 산은은 7억5000만달러를 모두 출자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산은이 여러 논리에서 미국GM에 밀리자 협상 막판엔 ‘거부권(비토권)이라도 유지하자’며 대부분 양보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애초 산은은 미국GM의 자금 지원 요구에 실사를 한 다음 지원 여부와 규모를 확정하겠다고 대응했다. 산은은 미국GM이 한국GM에 차입금 금리와 이전가격을 다른 나라의 현지 법인에 비해 차별적으로 적용했을 것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산은은 실사가 80% 이상 마무리된 4월 말까지도 이 부분에서 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첫 단계부터 꼬여버렸으니 제대로 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은은 ‘미국GM이 지금까지 여러 방법으로 한국GM에서 자금을 회수했다→이는 한국GM 부실의 큰 원인이다→이 때문에 대주주인 미국GM이 책임을 져야 한다→차등감자를 한 뒤 신규 자금을 투입하라→그러면 산은도 많지 않은 수준에서 신규 자금을 넣겠다’는 전략으로 협상에 임했다.

하지만 이전가격 등에서 산은의 지적이 그야말로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자 미국GM은 차등감자 요구를 단칼에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감자 자체는 없는 얘기가 됐다. 이후 산은이 주요 결정사항에 대한 비토권에 매달리자 나머지는 미국GM이 하자는 방식대로 진행됐다.

금융계에선 산은이 부실기업에 차등감자 없이 자금을 지원한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산은은 부실기업에 대해선 대주주의 경영 책임을 물어 100 대 1까지의 차등감자를 적용했다. 금호타이어와 STX조선해양의 노조에 끌려다니더니 이번엔 미국GM에 휘둘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