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 정책에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맹주들이 국익을 앞세워 맞서고 있다. 유럽산 철강에 대한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 움직임에 유럽 주요국은 관세 조치를 철회하지 않으면 보복에 나서기로 했다.
"美 일방주의 안돼"… 英·佛·獨, 철강 관세·이란 핵협정 파기에 제동
이란 핵협정을 놓고도 미국은 대폭 수정 또는 파기를 주장하는 반면 유럽은 일부 수정하되 합의 틀은 유지하자는 쪽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주 차례로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무역·안보 현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했다.

◆“유럽 이익 지킬 것”

메르켈 총리와 마크롱 대통령,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등 3국 정상은 지난 29일(현지시간) 3자 전화 통화를 통해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에 공동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메르켈 총리는 통화 후 발표한 성명에서 “3국 정상은 미국이 유럽연합(EU)에 불리한 무역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며 “유럽은 다자무역 질서의 틀 안에서 이익을 지킬 준비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미국이 대서양 연안 국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미국은 지난 3월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유럽산 제품에 대해선 5월1일까지만 유예 기간을 뒀다. 미국이 영구 면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제 유럽산 철강·알루미늄에도 관세가 부과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중국에 이어 EU와도 통상 마찰을 빚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EU는 이미 미국산 오렌지와 청바지, 오토바이 등 28억유로 규모의 보복 관세 품목 리스트를 마련해놓고 있다.

미국이 막판에 양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있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이날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동맹국에 한해 철강·알루미늄 관세 유예를 연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모든 나라에 대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핵협정, 일몰조항 등 수정해야”

독일과 영국, 프랑스 정상들은 이란 핵 협정과 관련해서도 “기존 협정이 이란 핵무기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미국이 주장하고 있는 협정 파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세 정상은 미국이 협정을 파기했을 경우 후속 조치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 핵 협정은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중국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과 독일 등 6개국이 2015년 7월 이란을 상대로 맺은 협정이다. 이란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EU가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유럽이 핵협정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이란과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2016년 1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가 해제된 뒤 유럽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현지에 진출했다. 프랑스 에어버스는 이란에 항공기 170대를 판매하기로 계약했고 독일 폭스바겐은 지난해 17년 만에 이란 시장에 들어갔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10월18일 모든 이란 제재를 해제한다는 일몰조항 삭제와 △핵 개발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 개발도 제한할 것 △이란 전역에 대한 사찰 허용 등을 주장하면서 이 같은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내법에 따라 5월12일까지 이란 핵협정 준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유럽 정상들은 이란 핵협정의 일부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엔 동의했다. 탄도미사일 제한과 2025년 협정 만기 이후의 제재 문제, 이란의 중동 내전 개입 문제 등은 새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

◆이란 “기존 협정 재협상 불가”

그러나 이란이 핵협정 재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게 변수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유럽 3개국 정상 간 통화가 이뤄진 뒤 마크롱 대통령과 한 전화 통화에서 “기존 협정 개정은 협상 불가”라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한 시간 넘게 이어진 통화에서 로하니 대통령에게 “추가로 논의해야 할 필수적인 주제가 있다”며 재협상 방침을 밝혔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얻는 데 실패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이란은 기존 약속을 넘어서는 어떤 제한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만나 “이란이 핵 협정을 수정할 수 없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협정을 파기할 것”이라며 이란을 재차 압박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