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들이 해외 진출에 사활을 걸면서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다케다제약이 650억달러(약 70조원)를 들여 아일랜드 제약사인 샤이어 인수에 나서는 등 올 들어 초대형 M&A가 줄을 잇고 있다. 30년 전 소니가 컬럼비아픽처스를 인수하고, 미쓰비시가 뉴욕 록펠러센터를 사들인 거품경제 전성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1980년대와 달리 현재 일본은 인구가 하루에 1000명 정도 줄어들면서 내수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해외 M&A에 나서고 있다.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에 힘입어 시중에 저금리 자금이 넘쳐나는 만큼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들도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해외 기업 인수에 뛰어드는 분위기다.

◆중국 앞지른 일본의 해외 기업 인수

1일 파이낸셜타임스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올 들어 일본 기업들은 238건, 290억달러 규모의 해외 기업 인수에 나서 중국을 앞질렀다. 소프트뱅크는 올해 초 컨소시엄을 구성한 뒤 우버 인수에 76억달러를 쏟아부었다. 결국 지분 17.5%를 확보해 최대주주에 올랐고 최근엔 미국 첨단 건축업체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일본 전통 제조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도 활발하다. 후지필름은 두 건의 초대형 M&A에 총 69억달러를 투입했다. 후지필름은 지난 1월 오랫동안 제휴한 미국 제록스를 완전히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제록스 측 반발로 최종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계속 인수를 추진할 방침이다. 3월에는 미국 바이오업체 어바인을 사들여 바이오 의약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재팬타바코(JT)는 17억4100만달러에 러시아 최대 담배 회사인 돈스코이를 인수했다.
日기업, 내수 쪼그라들자 해외 M&A 사활… '차이나머니' 앞질렀다
일본 기업들의 적극적인 M&A는 인구 감소로 인해 줄어드는 내수 시장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다. M&A 전문 로펌인 셔먼앤드스털링 도쿄지사의 케네스 르브런 변호사는 “기업들이 앞으로 10년을 더 기다린다면 그 사이 시장이 줄어들면서 상황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해외 진출을 되도록 서둘러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는 2010년부터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해외 M&A 규모는 총 12조8548억엔(약 125조8150억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본의 글로벌 기업 사냥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히타치, 리코, 스미토모 등 9개 대기업은 향후 3년 동안 총 300억달러를 해외 기업 인수에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시장 도전에 나서는 일본 기업

내실을 중시하고 순혈주의가 강한 일본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소니와 히타치 등 주요 기업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과감하게 M&A에 나서는 한편 주력이 아닌 사업은 정리하고 있다.

성장이 정체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최고경영자(CEO)로 외국인을 영입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다케다제약의 대형 M&A는 2014년 영입한 프랑스 출신 크리스토퍼 웨버 사장이 주도하고 있다. 이 회사는 영어로 주요 업무를 처리한다. 주주들도 주식 한 주당 이익률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경영자들은 주주를 의식해 적극적으로 수익률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벳쇼 겐사쿠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M&A고문단장은 “과거엔 기업 인수로 매출이 증가하거나 회사 규모가 커질지에 대해 논의했지만 최근엔 자본수익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무리한 차입에 대한 우려도

마이너스 기준금리로 인해 수익성에 직격탄을 맞은 미쓰비시UFJ파이낸셜과 미쓰이스미토모 등 대형 은행들 역시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다. 이들은 동남아시아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한편 일본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미쓰비시UFJ파이낸셜은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에서 잇따라 금융회사를 인수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60억달러의 거액을 들여 인도네시아 다나몬은행 지분 73.8%를 확보했다. 일본에서는 인구 고령화로 인해 소비자들이 더 이상 돈을 빌리지 않는 탓에 영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이다.

대형 은행들은 기업의 M&A 자금 대출에도 적극적이다. 일반 기업 대출에 비해 평균 0.3%포인트 더 높은 금리를 챙길 수 있어서다. 로펌 모리슨앤드포스터의 캐네스 시걸 변호사는 “최근 일본 은행들이 해외 M&A에 공격적으로 낮은 금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일본 기업들이 저금리 상황에서 무리하게 돈을 빌려 M&A에 나서는 것은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예로 최근 샤이어를 인수하기로 한 다케다제약은 재무건전성 악화 우려 때문에 주가가 폭락했다. 다케다제약의 지난해 말 기준 예금 등 현금 보유액은 약 4400억엔에 불과해 대규모 차입이 불가피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