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준(準)조세’ 성격의 기부금을 기업에 잇달아 요청해 논란을 빚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대기업에 돈을 걷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기금은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당시 농어민 지원을 위해 설정됐다. 대기업·공기업 등의 기부로 매년 1000억원씩 10년간 조성하되, 부족분은 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하고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출발 때부터 정부가 무슨 수를 쓰든지 목표 기금을 채우도록 의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뿐만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혁신운동’ 2단계 사업을 추진하면서 대기업들에 약 2700억원의 기부금을 요청했다. 대기업들이 중소협력사들에 스마트 공장 건설과생산·경영 노하우 전수를 위해 지난 5년간 진행된 1단계 사업에서만 97개 기업이 2277억원의 기부금을 냈다.

부처들은 “민간 자율에 맡겼을 뿐 압박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대기업은 없을 것이다. 정부와의 협의 자체가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되리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뻔히 알 수 있다. “기부금을 냈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쏟아진다.

더욱이 현 정부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대기업 기부금 출연을 ‘적폐’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준조세 금지법을 만들어 기업을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럼에도 대기업의 ‘협조’를 얻어 농어촌과 중소협력사 지원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않아도 법인세율·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기업 경영 여건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정부는 대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상법 개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재벌개혁’을 외치면서 뒤에선 기업에 ‘기부금 고지서’를 돌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역대 정부마다 이런 저런 명분을 붙여 기업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게 관행처럼 굳어져 왔다. 2016년 한 해만 해도 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가 20조원에 달했다. 이런 관행은 종식돼야 한다. 문 대통령도 약속했듯, 대기업 기부 강요를 제도적으로 막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