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엘리엇 ISD 빌미 제공하고 "내용 잘 모른다"는 복지 장관
보건복지부의 국민연금 담당 실무자들은 지난달 중순부터 연일 법무부 등과 대책 회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지난달 법무부에 ‘중재의향서’를 냈기 때문이다. 중재의향서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하기 전 중재 의사를 물어보는 절차다. 법무부가 중재를 거부하면 엘리엇은 ISD를 제기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정작 복지부를 이끌고 있는 박능후 장관은 관련 내용에 대해 ‘잘 모른다’고 9일 밝혔다. 박 장관은 이날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의 ISD 대응 상황과 계획,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법무부가 국가소송의 당사자로서 담당하고 있다”며 “법무부가 중재의향서를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엘리엇의 강공은 법원과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법원은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 등 관련자에게 2심까지 유죄를 선고했고, 복지부 적폐청산위원회는 대법원 판결도 나오기 전 ‘삼성물산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은 적폐였다’고 발표해 엘리엇에 명분을 줬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담당 부처 수장의 첫마디가 ‘나는 모른다’였다. 정부 관계자는 “실무자들이 연일 대책 회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관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섣불리 발언했다가 향후 소송에서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어 말을 아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정부가 엘리엇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안 들어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아직 입장 정리를 명확히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패소할 경우 국민 세금으로 수천억원을 물어줘야 할 사안에 대해 복지부 장관이 공석에서 ‘내용을 모른다’고 언급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국가소송의 당사자는 법무부이지만 ISD의 원인을 제공했고 엘리엇에 맞서 방어 논리를 만들어야 할 담당 부처는 복지부이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앞서 엘리엇이 중재의향서를 낸 사실도 보름 넘게 숨기다가 본지 보도(5월1일자 A1, 3면 참조) 이후에야 고백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는 중재의향서를 받으면 신속히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복지부는 여전히 공개 날짜도 밝히지 않고 있다.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