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8일(현지시간) 이란 핵협정 탈퇴와 경제제재 재개를 선언했다. 앞으로 세계 원유시장 위축으로 유가 불안정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금과 귀금속, 철강, 석탄 등의 상거래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16년 1월 대(對)이란 경제제재가 해제된 뒤 교역을 늘려온 기업들은 초비상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한 3~6개월 유예기간 안에 기존 거래계약을 정리하지 않으면 제재를 받을 수 있어서다.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 발표 뒤 떨어졌던 국제 유가는 곧바로 배럴당 70달러 위로 반등하며 강세를 이어갔다.

11월까지 석유 거래 등 청산해야

트럼프 대통령은 핵협정 탈퇴를 발표하면서 “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갈 것”을 행정부에 지시했다. 경제제재는 3~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재개될 예정이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란과 거래해온 기업 등이 기존 거래를 청산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석 달 뒤인 8월6일부터 미국 기업은 이란과의 항공기 및 부품 수출, 달러 거래, 금과 기타 금속 거래, 자동차 거래 등을 할 수 없게 된다. 원유 등 에너지부문 제재도 6개월 뒤인 11월4일부터 재개된다.
더 무서운 것은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과 정부에 대해서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이다. 11월께부터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므누신 장관은 “동맹국과 마찰이 있더라도 유예 기간이 지나면 이란과 계속 사업하는 모든 기업에 벌칙을 부과하겠다”며 날을 세웠다. 미국 로펌 노턴로즈풀브라이트의 제이슨 헝거퍼드 파트너는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에 나서면 유럽 기업이 겪는 충격은 유럽 당국이 직접 제재하는 경우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피해를 보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보잉은 이란과 200억달러 규모의 항공기를 수출하기로 합의했으나 미 정부의 판매 허가가 취소될 예정이다. 에어버스의 항공기 판매와 제너럴일렉트릭의 항공기 엔진 수출도 타격을 받게 됐다. 이란에서 가스전 개발 등을 추진해오던 토탈과 로열더치쉘 등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정부의 이란 제재 부활은 향후 3~6개월간 세계 원유시장을 위축시키고 수백억달러 규모의 글로벌 거래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므누신 장관은 다만 “이란으로부터의 구매를 현저하게 줄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국가는 면제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동 불안정 땐 유가 80弗 가능성

이란과의 상거래 위축뿐만 아니라 국제 원유 시장의 불확실성도 커졌다.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가 발표된 뒤 급락했던 국제 유가는 곧바로 반등세를 탔다. 트럼프 대통령이 3~6개월 유예기간을 설정하면서 협상 가능성을 밝힌 데다 단기 급등에 따른 차익매물이 나오며 한때 가격이 크게 떨어졌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9일 장외시장에서 7월물 북해산 브렌트유는 장중 한때 3% 넘게 오르며 배럴당 77달러대로 뛰었다. 6월물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71달러를 넘기도 했다. 제럴드 베일리 페트로테크에너지 회장은 “만약 이란이 핵실험 재개를 추진하고 이에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면 가격은 더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헬리마 크로프트 RBC캐피털마켓 수석상품전략가는 “이란산 원유 수출이 하루에 20만~30만 배럴 정도는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란이 핵확산방지협정(NPT)을 탈퇴하고 핵개발을 재개하거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늘린다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반격해 중동의 군사 충돌 가능성이 고조될 수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사우디도 최대한 신속하게 핵을 개발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 역시 이란이 핵을 보유하면 공습을 통해서라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