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난 진양곤 에이치엘비 회장(사진)은 글로벌 신약의 탄생이 머지않았다고 강조했다. 진 회장은 미국 자회사 LSK바이오파마를 통해 경구용 표적항암제 ‘리보세라닙’을 개발하고 있다. 말기 위암 환자 459명을 대상으로 미국 유럽 한국 일본 등 12개국에서 리보세라닙의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임상 절차의 65% 정도가 이뤄졌다. 올해 안에 임상 3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신약허가 신청은 내년 하반기로 예상하고 있다.
진 회장은 “리보세라닙은 이미 중국에서 출시돼 지난해 3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며 “2015년 출시 이후 심각한 부작용이 없었고, 환자들의 예후도 좋기 때문에 진행 중인 임상 3상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은행원, 호프집 사장, M&A꾼
진 회장은 원광대 법학과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부산은행과 평화은행을 거치며 기획업무를 담당하다 외환위기로 평화은행이 우리은행에 합병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빚을 내 서울 강남에 호프집을 차렸다. 과로로 쓰러져 입원해야 했던 적도 있다. 1년 만에 호프집을 팔고 은행 근무 경험을 살려 중소기업의 성장전략을 짜주는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부실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인수합병(M&A)이 필수적이었다. 진 회장에게 ‘M&A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우리 사회에 M&A를 바라보는 시각이 호의적이지 않다 보니 진 회장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하면서 좋은 사업과 나쁜 사업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사업보다 사람을 봐야 한다는 철학도 이때 갖게 됐다.
그는 “많은 회사가 선택과 집중을 한다고 하는데 은행 근무 당시 한 우물을 파다가 무너지는 회사를 많이 봤다”며 “한 우물만 파면 빠른 산업의 변화에 대응하기 힘들다”고 했다.
진 회장은 한 회사가 두세 가지 사업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생존을 위한 조건이다. 또 생존만 하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게 진 회장의 생각이다. 에이치엘비도 조선업 호황 때 구명정 사업으로 돈을 꽤 벌었다. 그 돈으로 바이오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 추구하는 노마드
그는 자신의 집무실과 신사업기획팀이 있는 논현동 사무실에 ‘노마드’란 이름을 붙였다. 유목민처럼 특정한 가치와 방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에이치엘비가 제약·바이오 기업으로 변모한 여정에도 이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진 회장은 전자부품회사 하이쎌을 인수한 뒤 에이치엘비(옛 이노GDN)를 사들였다. 에이치엘비와 구명정을 제조하는 현대라이프보트를 합병해 흑자 구조를 만들었다. 전자부품 사업 환경이 어려워지자 매각하기로 한 것은 자회사가 아니라 모회사 하이쎌이었다. 2013년 모회사를 매각하면서도 남겨둔 것은 에이치엘비가 투자한 LSK바이오파마와 라이프리버였다. 진 회장은 하이쎌 매각자금으로 바이오 투자를 가속화했고, LSK바이오파마와 라이프리버는 바이오 사업의 양대 축이 됐다.
의약품 분야 전문가가 아니던 그가 두 회사에 투자를 지속한 것은 경영진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진 회장은 “김성철 LSK바이오파마 대표를 만난 뒤 그의 인품과 능력에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중국에서 들려오는 리보세라닙의 성공 스토리도 그의 생각에 힘을 보탰다.
◆중국에서 성공한 리보세라닙
리보세라닙은 글로벌 제약사 암젠의 수석연구원이었던 폴 챈이 개발한 항암제다. 새로운 혈관 생성에 관여하는 수용체 ‘VEGFR-2’만을 차단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새로운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아 커지는 암의 진행을 막는 방식이다. 리보세라닙과 같은 구조인 로슈의 ‘아바스틴’과 일라이릴리의 ‘시람자’는 지난해 각각 7조5000억원과 8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중국 제약기업 헝루이는 폴 챈이 설립한 어드벤천연구소로부터 2005년 리보세라닙의 중국 판권을 사들였다. 2014년 허가를 받아 2015년부터 중국에서 위암 3차 치료제로 판매를 시작했다. 3차 치료제란 위암을 진단받은 환자에게 처음 처방하는 1차 치료제가 효과가 없어 쓰는 2차 치료제마저 듣지 않을 때 처방하는 약이다. 헝루이는 출시 3년 차인 지난해 3000억원어치 이상의 리보세라닙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복제약 중심의 제약사였던 헝루이는 리보세라닙을 통해 신약 개발 기업으로 부상했고, 현재 시가총액은 40조원에 달한다.
에이치엘비의 자회사 LSK바이오파마가 위암 3차 치료제 임상 3상의 성공을 낙관하는 이유다. LSK바이오파마는 2007년 어드벤천연구소에서 리보세라닙의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권리를 확보했다. 리보세라닙은 2016년 한국, 지난해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되면 시판 후 7년간 독점 판매권, 신속심사, 연구개발비 세금공제 등의 혜택을 받는다.
진 회장은 “리보세라닙이 출시된 중국에서는 헝루이를 중심으로 150여 건 이상의 임상을 하고 있다”며 “긍정적인 결과가 연이어 발표돼 리보세라닙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헝루이는 위암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리보세라닙을 다른 고형암 치료제로 개발 중이다. 대장암과 폐암 등 다른 고형암에서도 혈관내피성장인자수용체(VEGFR)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면역항암제 병용 임상 임박
그는 “최근 항암제 시장에서는 면역관문억제제와 다른 항암제를 같이 쓰는 병용요법이 대세”라며 “병용요법에서의 핵심은 부작용이 적은 것인데, 리보세라닙은 낮은 부작용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BMS의 면역관문억제제 옵디보와 리보세라닙의 병용 임상이 이뤄지고 있다. 조만간 다른 면역관문억제제와의 병용 임상도 시작될 것이라고 진 회장은 귀띔했다. 아바스틴이나 시람자가 고가의 바이오 의약품인 반면 리보세라닙은 제조비용이 싼 저분자화합물이란 것도 강점이다.
에이치엘비는 최근 리보세라닙의 기술수출 전략을 수정했다. 일부 지역의 판권만 수출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판매 제휴를 맺을 생각이다. 대장암 및 면역관문억제제 병용 등 후속 임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수출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진 회장은 “제약사들이 신약후보물질을 기술수출하는 것은 개발 실패에 대한 위험성을 떠안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며 “리보세라닙은 글로벌 임상이 마무리 국면이고, 병용 항암제로서의 가치도 높아지고 있어 권리를 모두 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제약·바이오 기업으로서 지속 성장하기 위한 후속 물질 개발도 순항하고 있다. 라이프리버는 줄기세포치료제 헤파스템에 대해 이달 초 요소회로이상증(UCD)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 2b상을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승인받았다. 20여 년간 개발한 바이오 인공 간도 임상 2b상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희귀의약품 제도를 적극 활용해 임상 2상 이후 조건부 시판 허가를 신청한다는 계획이다.
진 회장은 “대한민국의 신약 개발 역사는 이제 시작 단계”라며 “앞으로 신약 하나로 수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회사가 5년 안에 한국에서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 신약 기업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민수 기자 hm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