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어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기고
해외 경제학자에게 한국 경제를 물어볼 때가 있다. 혹시나 귀가 번쩍 뜨이는 발언이 나올까 하는 기대에서다. 질문을 받은 해외 경제학자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한국 경제를 몰라 대답하기 어렵다”는 쪽과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을 내놓는 쪽이다. 주의 깊게 볼 건 후자다. ‘척척박사’처럼 보이지만 이름값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질문자의 의도를 읽고 대답을 내놓는 노회한 학자도 많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다. 한국에도 《창조적 학습사회》 등으로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높이 평가한 ‘J노믹스와 한국의 새로운 정책 아젠다’ 기고문이 국책연구소인 산업연구원이 펴내는 ‘i-KIET 산업경제이슈’에 게재됐다. 어떤 경위로 기고가 이뤄진 건지 내막은 모른다. 산업연구원은 보도자료까지 냈다.

칭찬은 기분 좋게 들리지만 납득할 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칭찬하는지 그 의도를 의심받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스티글리츠 기고문은 곳곳이 의문투성이다. 한국과는 번지수가 안 맞는 자신의 지론들을 엮어 양을 채운 듯한 느낌마저 든다.

스티글리츠는 “한국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바탕으로 ‘J노믹스’라는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전략을 도입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J노믹스는 중산층 중심 경제와 지식경제 창출이라는 두 기둥으로 과거와 다른 경로를 개척하고 있다”고도 했다. 번지르르한 목표 제시와 어떻게 달성하느냐의 문제는 다르다. 경제학자라면 지난 1년간의 J노믹스를 실증적으로 살펴야 하는 건 기본일 텐데 이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스티글리츠는 교육지표 몇 개를 끌고 들어와 한국을 칭찬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교육개혁은 물 건너갔다. 그는 복잡하고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통령이 주문한 ‘단순하고 공정한’ 입시제도 마련 때문에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인공지능(AI)과 공존을 모색해야 할 미래세대 교육은 뒷전이고 대학은 죽어가는 중이다.

스티글리츠는 한국의 ‘적극적인 노동정책’을 평가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강성노조, 기존 근로자의 포로가 된 ‘친(親)노동정책’이 신규 근로자의 진입, 새로운 일자리로의 이동성을 가로막는 현실이 ‘학습사회’를 강조하는 그의 눈엔 왜 안 보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을 보완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한국은 “시장이 정부를 보완하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정부 주도라는 유산비용이 줄어들기는커녕 권력이 시장을 통제하는 이른바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 경제를 위협하는 지경이다. 그는 ‘시장실패’를 말하지만 한국에선 ‘정부실패’가 더 두렵다.

스티글리츠는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전략을 칭찬하면서 경제력 집중 문제를 지적한다. 경제력 집중이 두렵다고 기업의 성장의지를 꺾는 나라가 있으면 예를 한번 들어 보라. 역사적으로 봐도 경제력 집중을 깬 건 정부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 새로운 투자, 새로운 수요, 새로운 시장, 새로운 산업이었다.

스티글리츠가 이를 위한 ‘산업정책’을 강조하는 거라면 백번 찬성이지만, 그 전에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그 ‘새로운’ 것을 향한 기업가정신의 분출을 가로막는 규제가 많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규제완화’로 인한 미국 금융의 폐해를 말하지만 한국 금융은 ‘규제과잉’으로 금융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경제의 역동성을 죽여놓고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을 백날 부르짖어 봐야 헛일이다. 안에서 나오는 비판은 듣기 싫고 밖에서 노벨경제학상의 권위를 빌린 칭찬은 듣고 싶은 ‘보이지 않은 손’이라도 있었던 건가. 산업연구원이 스티글리츠에게 지급한 기고료가 얼마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지식사대주의’라는 자괴감만 더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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