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마랜드
서울 용마랜드
불 꺼진 회전목마와 멈춰버린 바이킹, 녹슨 놀이기구들….

서울 면목동 용마산 기슭에 있는 ‘용마랜드’의 모습이다. 1983년 개장해 한동안 소풍 장소로, 동네 아이들의 주말 놀이터로 사랑받았다. 주변에 다른 놀이공원이 개장하며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여파로 운행을 멈췄다. 2011년엔 놀이공원 허가가 취소돼 폐장했다. 사실상 20년간 시간이 멈춰 있던 이 공간에 사람이 다시 몰리기 시작했다. 하루평균 30여 명, 주말에는 100여 명의 사람이 찾아온다.
서울 용마랜드
서울 용마랜드
버려진 공간의 재발견

용마랜드처럼 세월의 흔적을 품고 늙어가는 공간에 10~20대가 몰리고 있다. 이들은 페인트칠이 벗겨진 회전목마에 탄성을 지른다. 폐허가 된 대학교 산기슭 야외수영장으로 숨어든다. 지어진 지 반 세기가 넘는 아파트도 이들에겐 탐방 장소다.

자고 나면 새 건물이 올라가는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거꾸로 옛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낡은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버려지거나 오래된 공간에서 ‘남과 다른 것’을 느끼기 위한 목적이 크다. 인스타그램 등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세대에 고층건물과 첨단기기는 이미 흔한 것이 돼 버렸다.

25세 대학생 김유니 씨는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카페와 갤러리, 유명한 해외 여행지는 식상해졌다”며 “남들이 잘 모르는 곳, 낡았지만 독특한 감성이 묻어 있는 곳이 친구들 사이에서 ‘핫한 장소’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용마랜드는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도 활용되면서 외국인도 많이 찾는 장소가 됐다. 친구들끼리 기념사진을 찍는 ‘우정사진’과 웨딩촬영 장소로도 인기다. 최근엔 10~20대가 열광하는 장소가 되면서 대형 문화 행사, 페스티벌이 열리기도 한다.

아이유, 방탄소년단, 레드벨벳, 엑소 등 유명 아이돌 가수가 촬영 장소로 이곳을 찾았다. 지난달 말 열린 맥주 페스티벌 ‘밀러 원더나잇’ 행사 때는 인기 아이돌 가수들이 놀이동산의 옛 무대에 올랐다.
동대문아파트
동대문아파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낡은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서울 충정로역 인근 충정아파트는 초록색 칠이 벗겨진 채 서 있는 4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1936년 건설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남아 있다. 원래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이었다. 일본 건축가의 이름을 따 ‘도요타(豊田)’ 아파트로도 불렸던 이곳은 광복 후 미군 숙소와 호텔로 쓰이다 1975년부터 일반 아파트로 바뀌었다.

동대문아파트는 서울의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아파트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ㄷ’ 자 복도식 구조가 독특하다. 건너편 이웃집과 빨랫줄을 길게 연결해 옷을 널어놓는 풍경이 정겹다. 거주자들은 불편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이 아파트들 역시 색다른 풍경과 세월의 흔적을 찾으려는 방문객으로 붐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있는 야외 폐수영장도 남다른 장소를 찾는 이들에게 ‘핫플레이스’다. 서울대 캠퍼스 내 유전공학연구소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산길에 난 좁다란 나무 계단을 따라 한참 걸어가면 나타나는 수영장 터에는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이야기 나누는 학생들로 넘쳐난다.
제주 앤트러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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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감성 담은 카페·바도 인기

옛것에 열광하는 젊은 층이 늘면서 상업 공간에도 ‘레트로 인테리어’가 유행하고 있다. 서울 을지로의 와인바 ‘십분의 일’은 1970~1980년대 낡은 소주방 콘셉트로 회색 시멘트벽에 철골이 드러나도록 했다. 종로 익선동의 카페 ‘엉클비디오타운’은 개봉된 지 5~10년 이상 된 영화와 추억의 만화영화를 빔프로젝터로 상영하고, 라면땅과 핫도그 등 추억의 간식을 내놓는다.

울산 성남동의 주점인 ‘우리집 안방’은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마주하던 밥상의 느낌을 살려 스테인리스 밥상에 음식과 술을 내놓는다. 부산 부전동의 ‘모티집’ 역시 1980~1990년대 버려진 가전제품과 잡지 등의 소품으로 가게를 꾸미고 집에서 쓰는 나무 밥상에 앉아 술을 마시도록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버려지거나 오래된 공간을 찾는 젊은이들의 심리에 대해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가서 남들과 다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며 “흔하지 않은 장소에 가고 이를 기록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과거 스토리와 감성도 공유해 특별함을 표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효주/김보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