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간판 기업을 글로벌 정상으로 키워낸 주역들이 하나둘 지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힘든 시기에 구본무 회장 같은 재계 맏어른의 혜안과 지혜가 절실한데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20일 구본무 LG그룹 회장 타계 소식을 전해 들은 재계 인사들은 “숙연함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등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경제계 주역들이 최근 몇 년간 지병으로 경영 일선에서 잇따라 물러나고 있는 상황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국내 간판 기업을 수성해야 할 후배 경영인들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는 평가다.
5대 그룹 총수 세대교체 중

이날 구 회장 타계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국내 5대 그룹이 사실상 모두 세대교체에 들어갔다. 경영권 승계작업을 비교적 일찍 마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제외하면 최근 몇 년간 총수들의 경영권 승계가 잇따라 진행되고 있다. 재계 1위 그룹인 삼성은 2014년 5월 이 회장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뒤 이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총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롯데그룹도 신 명예회장이 치매 증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차남인 신동빈 그룹 회장이 2015년부터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기업은 모두 총수의 예기치 않은 사고나 지병으로 경영권 승계가 시작돼 ‘곤욕’을 치렀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1년간 실형을 살다가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롯데는 신 회장과 신 회장의 형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간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다.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도 올 들어 지배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경제계는 지배구조 개편이 마무리되면 단계적으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경영 보폭을 넓혀 갈 것으로 보고 있다.

구 회장 역할을 대신할 외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는 지난해 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소속 회사를 (주)LG 경영전략팀에서 LG전자 정보디스플레이(ID)사업부로 옮겼다. 구 상무는 다음달 주총에서 (주)LG 등기이사로 선임된 뒤 소속 회사를 다시 (주)LG로 옮길 예정이다.

복잡해지는 대내외 경영 변수

국내 주요 그룹의 역사가 대부분 반세기를 넘기면서 기업 오너들의 세대교체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5대 그룹뿐 아니라 한화, 현대중공업, 두산, 효성 등 대기업에서도 오너 3, 4세들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은 유례없는 속도로 바뀌는 대내외 경영 환경이다. 이날 구 회장 빈소를 찾은 한 대기업 오너는 “4차 산업혁명이나 보호무역주의와 같은 경영 변수는 30년이 넘는 경영현장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며 “막막한 바다 한가운데 등대가 될 수 있는 선배 경영인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에 최근 국제 유가 급등과 미국의 금리 인상, 원화 강세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글로벌 경제 변수는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 되고 있다. 기업 경영에 다소 적대적인 국내 상황도 커다란 부담이라고 기업인들은 입을 모았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들은 ‘적폐 청산’을 내걸고 동시다발적으로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법인세 인상 등 기업의 경영 활동을 옥죄는 규제도 나날이 강화되고 있다.

주요 그룹 총수들의 세대교체가 마무리되면서 앞으로 3~4년간 국내 기업 경영 체제는 큰 변화가 예상된다. 경영 전면에 등장한 오너 3, 4세대들은 대부분 해외 명문대를 졸업한 유학파로, 새로운 의사 결정 시스템과 경영 전략을 도입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부와 시민단체들도 투명한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10년 후 한국 시장과 사회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이에 맞는 기업 지배구조와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