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분배동맹'이 지배하는 나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그가 민주노총 간부와 벌인 설전을 보고 나서다. 홍 원내대표는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대해 “누가 봐도 불합리한 것은 고쳐야지, 그냥 갈 수는 없다”며 “민주노총이 너무 고집불통이다. 양보할 줄을 모른다”고 비판했다.

정부·여당 핵심인사가 ‘촛불 지분’을 요구하는 민노총에 입바른 소리를 한 게 처음이지 싶다. 당장 노동계에선 ‘반(反)노동 막말꾼’이란 맹비난이 나왔다. 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 등 어떤 회의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놨다.

이 장면에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집단이 누구인지 새삼 확인케 된다. 참여연대 못지않게 권력이 된 민노총이다. 민노총 주력은 대기업·공기업·공무원·교사 등의 노조다. 고임금에다 직업 안정성도 높은 소위 ‘괜찮은 일자리’다. 이들 상위 10%의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정책이 춤춘다. 홍 원내대표가 상기시킨 대로 전체 노동자 1900만 명 중 양대 노총 소속은 200만 명에 불과하다.

노동단체들의 행태가 중세 길드 같은 동업자조합과 닮아간다. 경쟁을 배제하고, 집단적 압력으로 이탈을 막으며, 조직 결속력에서 권력을 도출해 낸다. 로비, 압력, 세(勢) 과시 등으로 기득권을 관철한다. 이처럼 독과점 지대(rent)를 추구하는 이익집단을 미국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분배동맹(distributional coalition)’이라고 명명했다.

분배동맹은 사회 전체의 자원을 자신들에게 이전시키는 행위를 조장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기득권을 위해 신기술이나 혁신을 저지하고, 기존 분배구조를 온존시키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필연적으로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이 20세기 들어 후퇴한 것도 혁신을 방해한 분배동맹이 켜켜이 쌓인 후유증에서 비롯됐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은 “분배동맹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政)피아, 관(官)피아는 물론 노조, 시민단체, 전문직단체, 업종단체, 동창회, 향우회 등 크고 작은 동맹이 깊게 뿌리 내렸다. 겉으론 공정, 경제민주화, 약자 보호, 균형발전, 환경, 안전 등을 내걸지만 행동 동기는 철저히 이기적이다.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하고, 필수적인 개혁을 ‘개악(改惡)’이라고 호도하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개개인의 이기심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체 이익을 가져오지만, 분배동맹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집단 대 집단’의 투쟁을 낳고, 동맹 구성원과 바깥의 국외자 간에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소수에 의해 다수가 착취당하지만, 국민은 대개 ‘합리적 무시’로 반응한다. 소수집단의 이익은 엄청나지만 다수 국민의 피해는 ‘n분의 1’에 그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진정한 착취자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키는 이익집단”이라는 하이에크의 혜안대로다.

분배동맹은 성장이 정체된 사회의 전형적 현상이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는 결집이 약했지만 1987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성장률이 떨어지는 데 비례해 분배동맹이 깊고 넓게 확산됐다. 이는 끼리끼리 패거리 지어 나눠먹는 정실자본주의로 귀결되고 있다. 막 출발하려는 청년들에겐 지옥이나 다름없다.

올슨은 “경제정책과 법제도 수준이 그 나라의 경제를 결정짓는다”고 했다. 분배동맹과 정실자본주의를 깨려면 정부 간섭을 배제한 ‘시장 확장적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경제든, 혁신성장이든 안 되는 원인이 토지, 자본, 사람이 모자라서일까.

문재인 정부와 같은 시기에 출범한 프랑스의 마크롱 정권은 ‘프랑스병(病)’으로 고착화한 분배동맹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는 1968년 ‘68혁명’ 이후 50년간 쌓인 적폐를 깨고 있다. 반면 한국은 ‘친노동’을 넘어 ‘친노조’로 오히려 분배동맹을 강화해주는 판이다. 어떤 길이 옳았는지 4년 뒤 두 나라의 경제성적표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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