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北 비핵화 '과신의 함정'서 벗어나야
1972년 2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위해 중국에 갈 때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은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에 착륙했다. 상하이에서는 중국 정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중화대국을 방문하는데 어디 감히 곧바로 수도 베이징으로 오느냐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에 갔지만 면담일정을 전해 받지는 못했다.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허둥지둥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갔다. 키신저의 회고록 《On China》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중국, 북한처럼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는 반드시 협상 전에 여러 가지 ‘지저분한 술책(dirty tricks)’을 써서 기선을 제압한다. 남북한 최고실무협의를 연기하고, 풍계리 폭파 취재에서 보듯이 바짝 약을 올리고 난 뒤 선심 쓰듯이 마지막 순간에 우리 기자단의 방북을 허용했다.

지난주까지 북한은 과거에 우리에게 하던 그들의 협상 수법을 별 생각 없이 트럼프 정부에도 되풀이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국과의 실무협의에 사전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고, 북의 지도부 김계관, 이용호, 최선희가 합창하듯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싸잡아 비난했다. 옛날의 빌 클린턴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같았으면 이 같은 평양의 수법이 그런대로 먹혀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전혀 달랐다. 내달 12일로 예정된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북한이 기획한 풍계리 폭파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있던 바로 다음에 말이다.

평양은 단계적 보상을 주장한다. 핵실험장을 멋지게 날려버리는 통 큰 성의를 보이면 경제적 보상이란 떡이 굴러떨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트럼프 대통령의 폭탄선언이 날아온 것이다.

한때 노벨평화상 분위기까지 갔던 비핵화 협상에 완전 찬바람이 불었다. 제일 난감하게 된 것은 이 역사적 판을 기획하고 워싱턴DC를 오가며 추진한 문재인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우연인지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은 6·13 지방선거 바로 전날이다. 미·북 간에 비핵화 합의가 이뤄지면 지방선거는 여당의 완벽한 싹쓸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판세가 갑자기 뒤엎어져 잘못하면 본전도 못 챙길 지경이 됐다. 그간 우리 정부가 너무 과신해 성공의 환상에 빠진 탓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묘하게 일이 꼬여가고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가 변한 것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공직 경험이 없는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전직 대통령들과는 다른 독특한 비언어적 행위 즉, 보디랭귀지나 레토릭(rhetoric)으로 자신의 의중을 교묘하게 표출한다.

워싱턴DC 공동기자회견에서 그는 “문 대통령의 말을 통역할 필요 없다. 전에 들었던 좋은 말이 뻔할 테니까”라며 면박을 줬다.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우리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퉁명스런 반응이었다. 이건 단순한 외교적 결례 차원을 넘어 뭔가 문 대통령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 직후 싱가포르 회담의 성사 가능성이 99.9%라고 장담했다.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다. 폭탄선언을 듣고 평양이 깜짝 놀라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26일 남과 북의 지도자가 판문점에서 전격적으로 만났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북한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미·북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긴밀히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북한 비핵화를 위한 길이 순탄치 않은 게 사실이다. 정부는 지금까지의 과신을 버리고 보다 균형 잡힌 접근으로 손상된 워싱턴의 신뢰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지방선거를 의식해 성급한 행보를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