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억짜리 그림' 미술품 역대 최고가 경신한 김환기 화백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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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서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기도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붉은색 전면 점화인 1972년 작 '3-II-72 #220'이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또다시 경신하면서 김환기 화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김환기 화백은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 유학길에 올랐지만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고 연이어 같은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됐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은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에 심취해 그의 작품에서 도자기는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됐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그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도 지속됐다. 김환기는 파리에 머물면서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었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해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해외에 머물며 미술의 변화를 체험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잃지 않았던 그는 평생 그림을 그리다가 61세에 생을 마감했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고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됐다.
이번에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3-II-72 #220'은 김환기 작품 세계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뉴욕 시절의 전면점화 중 하나다. 세로 254㎝, 가로 202㎝ 대형 면포 위에서 수많은 붉은색 점이 엇갈리는 사선 방향으로 패턴을 이룬 작품 상단에는 푸른색 점들이 작은 삼각형을 이루며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info@hankyung.com
김환기 화백은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 유학길에 올랐지만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고 연이어 같은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됐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은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에 심취해 그의 작품에서 도자기는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됐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그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도 지속됐다. 김환기는 파리에 머물면서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었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해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해외에 머물며 미술의 변화를 체험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잃지 않았던 그는 평생 그림을 그리다가 61세에 생을 마감했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고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됐다.
이번에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3-II-72 #220'은 김환기 작품 세계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뉴욕 시절의 전면점화 중 하나다. 세로 254㎝, 가로 202㎝ 대형 면포 위에서 수많은 붉은색 점이 엇갈리는 사선 방향으로 패턴을 이룬 작품 상단에는 푸른색 점들이 작은 삼각형을 이루며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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