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동포 이민지(22·KEB하나은행)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꽤 높다. 한 번 버디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줄버디를 잡아내는 경우가 많아 ‘버디 트레인’이란 근사한 별명도 갖고 있다. 샷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든, 퍼팅한 공이 홀을 외면하든 얼굴을 떠나지 않는 미소에 반한 팬들도 많다. 한 홀을 망쳤어도 다음 홀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늘 씩씩하다.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보는 일이 없다. 그는 “대회마다 집중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얼굴을 찡그리면서까지 골프를 할 이유는 없다”고 늘 말한다. 이민지가 이번엔 활짝 웃었다.


1년7개월 만에 침묵 깬 ‘벙커 걸’

이민지는 28일(한국시간)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의 트래비스 포인트 컨트리클럽(파72·6734야드)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볼빅 챔피언십(총상금 130만달러)에서 나흘간 16언더파를 쳐 김인경(30)을 1타 차로 밀어내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2016년 10월 블루베이 LPGA 대회 우승 이후 1년7개월 만에 거머쥔 통산 4승째다. 이날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은 이민지는 우승 트로피와 함께 우승상금 19만5000달러(약 2억1000만원)를 생일선물로 챙겼다. 이민지는 “아침에 어머니가 끓여주신 갈비탕을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하루종일 샷과 퍼팅이 잘됐고 운도 따라줬다”고 말했다.

이민지는 롱게임과 쇼트게임이 두루 안정된 선수다. 드라이버 비거리가 올 시즌 평균 261.74야드로 LPGA 선수 가운데 31위에 올라 있고, 티샷을 페어웨이에 떨구는 확률도 75.35%로 40위다. 멀리 치면서도 똑바로 친다는 얘기다. 그린에 공을 올렸을 때의 평균 퍼팅 수도 전체 12위(1.76)다. 샷 지수 각 부문이 ‘특별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뒤처지는 게 없어 경기 운영이 안정적이다. 지난해 8월 브리티시여자오픈 이후 20개 대회 연속 본선 진출이 이를 방증한다. 이민지는 이번 대회 나흘간 유일하게 60타대를 기록해 다시 한번 ‘밸런스 골퍼’의 면모를 과시했다.

물론 수훈갑은 퍼트다. 대회 마지막 날 잡아낸 5개의 버디 중 4개가 까다로운 3~7m 정도의 중거리 퍼트였다. 15번홀(파4)에선 5m가 넘는 슬라이스 파퍼트를 성공시켜 김인경의 맹추격에서 한 발짝 달아날 수 있었다.

숨은 기여자가 하나 더 있다. ‘탁월한’ 벙커샷이다. 나흘간의 전체 경기 운용으로 봤을 경우 퍼트에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5번 벙커에 공을 빠뜨렸지만 3번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그의 샌드 세이브율은 62.9%로 시즌 전체 3위다. 벙커샷에 관한 한 13명의 서로 다른 올 시즌 LPGA 챔피언 중에서는 단연 1위다. 이민지는 지난달 메디힐챔피언십 17번홀(파3)에서도 벙커샷을 그대로 홀에 집어넣어 리디아 고를 연장전으로 끌고 간 귀중한 버디를 잡아냈다.

스퀘어 스탠스 벙커샷 ‘개성만점’

벙커샷은 대개 왼쪽 몸통을 왼쪽으로 열고, 클럽 페이스는 오른쪽으로 열어 친다. 공을 잘 띄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민지는 몸과 클럽헤드를 거의 열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인 아이언샷을 하듯 어깨선, 무릎선, 발끝 라인을 타깃과 거의 평행하게 선다. 대신 스윙을 아웃-인 궤도로 깎아 치는 ‘컷샷’으로 공을 띄우는 각도를 조절한다.

프로마다 제각각 자신만의 벙커샷 스타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갈수록 쉽게 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웨지의 진화가 한몫한다는 분석도 있다. 김현준 아쿠시네트 마케팅팀장은 “벙커샷이나 긴 러프에서의 로브샷 등 띄우는 샷을 오픈 스탠스가 아니어도 쉽게 할 수 있도록 바운스 각(바운스가 지면에서 세워진 각도)이 높거나 둥근 형태가 나오는 등 쉬운 클럽을 개발하는 게 요즘 트렌드”라고 말했다.

클럽헤드를 직각으로 만들어 치는 ‘스퀘어 스탠스’ 벙커샷의 강점은 작은 스윙으로 원하는 거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오차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민지의 벙커샷 스윙이 그리 크지 않은 배경이다.

류가형 프로(LPGA 클래스 A)는 “클럽의 리딩에지(헤드의 날 부분)가 모래를 깊이 파고들지 않게 자세를 낮추고, 몸통과 엉덩이 회전을 일반 벙커샷보다 더 확실히 해줘야 하는 게 스퀘어 스탠스 벙커샷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