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양극화, 소외계층의 고등교육 확대로 풀어야
“그렇게 비싼 등록금을 어떻게 부담하지요?” 한 해 수업료가 무려 5만달러가 넘는 미국 저명 사립대학의 총장을 만날 때마다 궁금했던 의문이다. 학생 1인당 적립금이 가장 많다는 에머스트대의 비디 마틴 총장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재학생의 70% 이상이 재정 지원을 받지요.” 보유 자산이 많고 기부문화가 보편화한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저소득층이 이런 귀족학교에 엄두를 내겠습니까?” “그래서 ‘2세대, 3세대’를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요.” ‘2세대, 3세대’라는 표현은 조부모 또는 증조부모가 대학을 다니지 않은 저소득층 지원자를 일컫는 말이다. 아이비 리그나 학부 중심의 소수 엘리트 교육을 하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 등 세계적 명문이 시행하고 있는 입학정책이다.

물론 우리 현실에서는 꿈 같은 얘기다. 대학 재정도 문제지만, 학생 선발의 자율권도 제약돼 있다. 소외계층 자녀를 적극 찾아 엘리트 교육을 한다니, 얼마나 건강한 사회공동체적 접근인가. 다수 민족과 문화가 융합된 ‘샐러드 볼(salad bowl)’의 미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소외계층 자녀도 버락 오바마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과 같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고학력자와 저학력자의 간격은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고등교육은 첨단산업의 진입장벽을 높이고, 계층 간 소득격차를 크게 벌려 놓고 있다. 지금은 부(富)의 원천이 지식과 정보, 새로운 혁신 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의 ‘디지털 양극화’나 최근의 4차 산업혁명 신드롬도 모두 동일한 사례다. 이런 환경에서 세계 각국은 양극화 해소와 분배 개선에 고심하고 있다. 실증분석은 소외계층에 대한 교육 기회 확대가 양극화와 사회 발전의 역동성을 동시에 해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이른바 고등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생태계를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사교육비를 줄이고 국민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평준화 정책을 추진해왔다. 10여 년째 등록금이 동결된 대학들도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하향 평준화로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의 명문대학 접근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지방의 명문고가 사라진 이후 오히려 개천이 말라버려 용이 탄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부터 소외계층이 선택할 수 있는 교육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고, 이것이 곧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물론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 아닌가.

최근에는 경제까지 어려워져 소외계층의 절벽은 더 높아지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면 소득격차는 더 벌어지기 마련이다. 임금에만 의존하는 저소득층은 경기 변동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정규직 확대, 근로시간 단축 등 약자 보호를 위해 도입된 노동시장의 규제도 오히려 저소득층과 소상공인만 더 위축시킬 따름이다. 실제로 하위 20%는 가계소득이 8.0% 줄어들고, 상위 20%는 9.3% 늘어났다니 분배정책이 무색하지 않은가.

분배는 결코 임금이나 부자 과세, 시장 규제만으로 개선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어설픈 시장 개입으로 고용 형태를 제한하거나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오히려 저소득층과 소상공인만 더 위축시킨다. 따라서 민간부문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동시에 소외계층이 신분 상승을 통해 빈곤의 세습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 기회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체계적인 정부 지원을 통해 소외계층의 ‘2, 3세대’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의 자율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를 연계하면 한국에서도 세계적 명문이 추구하는 입학정책이 정착할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이 성공하려면 소외계층의 차세대에게도 미래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