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한국감정원] "단독주택 공시가격 형평성 제고… 시스템 혁신으로 통계 신뢰도 높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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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학규 한국감정원장
설립 49년 만에 내부 출신 첫 원장
30여년 근무 경력 살려 A4용지 10장에 개선점 적어
최고의 성과 위해 노력할 것
좌우명은 '극진 실천'
매일 조깅하고 경제신문 스크랩
주택 공시價 균형성 중요
프로그래머 늘려 정확성 확보
설립 49년 만에 내부 출신 첫 원장
30여년 근무 경력 살려 A4용지 10장에 개선점 적어
최고의 성과 위해 노력할 것
좌우명은 '극진 실천'
매일 조깅하고 경제신문 스크랩
주택 공시價 균형성 중요
프로그래머 늘려 정확성 확보
“한국감정원에 입사하고 싶습니다!”
1987년 서른 살이었던 청년은 무작정 서울 연희동의 한국감정원장 집으로 찾아갔다.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취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감정원 입사를 꿈꿨지만 당시 한국감정원은 4년째 신입직원을 뽑고 있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청년은 감정원장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청년은 감정평가사 합격 동기생 3명을 모았다. 중국음식점에서 고량주를 들이켜 적당히 취기(醉氣)도 오른 상태였다. 4명의 청년은 인삼주스를 손에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한국감정원에 다니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채용해 주십시오.”
청년들의 패기와 당돌함에 놀란 감정원장은 어이없이 웃기만 했다. 그는 “지금으로선 인력채용 계획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한 달 뒤 청년은 감정원 관계자로부터 “감정평가사 대상 특별채용 공모가 있을 예정이니 지원해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함께 감정원장 집으로 쳐들어갔던 동기들은 그 새를 참지 못해 다른 길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결국 혼자 감정원에 지원한 이 청년은 다른 응시생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채용합격증을 쥘 수 있었다.
그렇게 입사한 이 청년이 김학규 한국감정원장이다. 30년간 감정원에 몸담았던 그는 2016년 혁신경영본부장을 끝으로 퇴임했다가 지난 2월26일 한국감정원장으로 취임했다. 한국감정원 설립 49년 만에 내부 출신 인사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학규 원장은 “입사할 때의 남다른 경험과 열정이 나를 이 자리로 이끈 것 같다”고 말했다.
첫 감정원 출신 원장
한국경제신문이 김학규 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은 지난 5일은 마침 취임 100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는 “오늘 직원들이 케이크를 사와 축하해줬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보였다.
한국감정원장은 그간 주로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고위관료 등 외부 출신이 독점했던 자리다. 남다른 입사 과정의 경험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감정원맨’인 그도 “감정원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입사의 꿈을 이뤘고, 기획본부장과 혁신경영본부장 시절 추진했던 ‘감정평가시장 선진화 3법’이 2016년 국회를 통과하는 등 감정원의 숙원을 해결해 소임을 다했다는 자부심으로도 충분했던 터였다.
2016년 퇴임한 뒤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 잠시 몸을 맡겼던 그에게 의도치 않았던 원장 자리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지난해 2월 전임 원장이 임기보다 일찍 퇴임하게 되면서 감정원장 공모 절차가 진행됐다. 내부 출신 원장을 염원하는 후배들의 재촉에 못 이겨 응모했다. 통상 외부 출신 인사가 맡았던 전례에 비춰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재공모가 시작됐다. 30년 전 감정원장과 담판을 짓던 열정이 떠오른 것도 이 무렵이다. 원장지원서를 낸 뒤 그는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리고 30년 근무 경험을 되새김하면서 한국감정원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등을 빼곡하게 스마트폰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쓴 메모만 A4용지로 10장이 넘는다. 시쳇말로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지만 거짓말처럼 원장으로 지명됐다. 김 원장은 “어떻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왠지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며 “이 메모 중 절반 정도는 앞으로 감정원을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 출신 감정원장이 처음 선임되면서 감정원 내부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업무 연속성이 높아 조직을 쉽게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데다 직원들도 원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만 김 원장은 “내가 낸 성적이 평균 이하라면 이후 제2의 김학규가 나올 가능성이 없어지는 까닭에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극진 실천’의 도
그의 인생 신조는 ‘극진(極眞) 실천’이다.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최배달 선생의 철학에서 착안한 것이다. 김 원장은 “최선을 다한다는 말 뒤에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며 “최선이 아닌 전력을 다해 실천하는 것이 인생 목표”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취임 후 극진 실천의 최우선 항목으로 공시가격의 균형성 제고를 꼽았다. 김 원장은 특히 “단독주택의 공시가격에 대한 균형성과 형평성에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시세반영률이 낮은 빌딩 등 비주거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 불평등 논란을 해소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덧붙였다.
김 원장은 재건축 사업과 관련한 업무영역 확대에도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시공사의 공사비 뻥튀기로 조합원의 부담금이 증가하고 이는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관리처분계획과 공사비 타당성 업무를 더욱 철저하게 수행해 재개발·재건축사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다수의 선량한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역설했다.
김 원장은 또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담금과 관련해 “일반 시민들이나 조합원 모두 알 권리 측면에서 부담금이 부과되기 전에 개략적인 금액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한국감정원이 지향하는 ‘부동산 관리’에도 적합한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한국감정원이 지금보다 한층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부동산 통계를 유일하게 공표하는 기관으로써 국가의 부동산 정책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감정원의 정체성을 ‘부동산 통계허브’로 구축하겠다는 것이 김 원장의 구상이다. 이를 위해 더 혁신적인 전산시스템을 갖추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학벌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끌어모으라”고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원장은 업무뿐 아니라 개인 관리도 극진하기로 유명하다. 2000년 셋째 딸이 태어나자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을 느낀 그는 매일 10㎞씩 뛰어 1년에 4000㎞를 채우기도 했다. 경제신문 열혈독자이기도 하다. 김 원장은 “한국경제신문은 5년째 스크랩해 모아둔 두꺼운 파일이 있을 정도로 꼼꼼히 본다”며 “일과 후 기사를 오려 붙이는 시간이 재밌는 일이 됐다”고 말했다.
이정선/김형규 기자 leeway@hankyung.com
1987년 서른 살이었던 청년은 무작정 서울 연희동의 한국감정원장 집으로 찾아갔다.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취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감정원 입사를 꿈꿨지만 당시 한국감정원은 4년째 신입직원을 뽑고 있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청년은 감정원장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청년은 감정평가사 합격 동기생 3명을 모았다. 중국음식점에서 고량주를 들이켜 적당히 취기(醉氣)도 오른 상태였다. 4명의 청년은 인삼주스를 손에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한국감정원에 다니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채용해 주십시오.”
청년들의 패기와 당돌함에 놀란 감정원장은 어이없이 웃기만 했다. 그는 “지금으로선 인력채용 계획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한 달 뒤 청년은 감정원 관계자로부터 “감정평가사 대상 특별채용 공모가 있을 예정이니 지원해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함께 감정원장 집으로 쳐들어갔던 동기들은 그 새를 참지 못해 다른 길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결국 혼자 감정원에 지원한 이 청년은 다른 응시생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채용합격증을 쥘 수 있었다.
그렇게 입사한 이 청년이 김학규 한국감정원장이다. 30년간 감정원에 몸담았던 그는 2016년 혁신경영본부장을 끝으로 퇴임했다가 지난 2월26일 한국감정원장으로 취임했다. 한국감정원 설립 49년 만에 내부 출신 인사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학규 원장은 “입사할 때의 남다른 경험과 열정이 나를 이 자리로 이끈 것 같다”고 말했다.
첫 감정원 출신 원장
한국경제신문이 김학규 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은 지난 5일은 마침 취임 100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는 “오늘 직원들이 케이크를 사와 축하해줬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보였다.
한국감정원장은 그간 주로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고위관료 등 외부 출신이 독점했던 자리다. 남다른 입사 과정의 경험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감정원맨’인 그도 “감정원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입사의 꿈을 이뤘고, 기획본부장과 혁신경영본부장 시절 추진했던 ‘감정평가시장 선진화 3법’이 2016년 국회를 통과하는 등 감정원의 숙원을 해결해 소임을 다했다는 자부심으로도 충분했던 터였다.
2016년 퇴임한 뒤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 잠시 몸을 맡겼던 그에게 의도치 않았던 원장 자리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지난해 2월 전임 원장이 임기보다 일찍 퇴임하게 되면서 감정원장 공모 절차가 진행됐다. 내부 출신 원장을 염원하는 후배들의 재촉에 못 이겨 응모했다. 통상 외부 출신 인사가 맡았던 전례에 비춰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재공모가 시작됐다. 30년 전 감정원장과 담판을 짓던 열정이 떠오른 것도 이 무렵이다. 원장지원서를 낸 뒤 그는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리고 30년 근무 경험을 되새김하면서 한국감정원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등을 빼곡하게 스마트폰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쓴 메모만 A4용지로 10장이 넘는다. 시쳇말로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지만 거짓말처럼 원장으로 지명됐다. 김 원장은 “어떻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왠지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며 “이 메모 중 절반 정도는 앞으로 감정원을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 출신 감정원장이 처음 선임되면서 감정원 내부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업무 연속성이 높아 조직을 쉽게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데다 직원들도 원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만 김 원장은 “내가 낸 성적이 평균 이하라면 이후 제2의 김학규가 나올 가능성이 없어지는 까닭에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극진 실천’의 도
그의 인생 신조는 ‘극진(極眞) 실천’이다.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최배달 선생의 철학에서 착안한 것이다. 김 원장은 “최선을 다한다는 말 뒤에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며 “최선이 아닌 전력을 다해 실천하는 것이 인생 목표”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취임 후 극진 실천의 최우선 항목으로 공시가격의 균형성 제고를 꼽았다. 김 원장은 특히 “단독주택의 공시가격에 대한 균형성과 형평성에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시세반영률이 낮은 빌딩 등 비주거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 불평등 논란을 해소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덧붙였다.
김 원장은 재건축 사업과 관련한 업무영역 확대에도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시공사의 공사비 뻥튀기로 조합원의 부담금이 증가하고 이는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관리처분계획과 공사비 타당성 업무를 더욱 철저하게 수행해 재개발·재건축사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다수의 선량한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역설했다.
김 원장은 또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담금과 관련해 “일반 시민들이나 조합원 모두 알 권리 측면에서 부담금이 부과되기 전에 개략적인 금액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한국감정원이 지향하는 ‘부동산 관리’에도 적합한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한국감정원이 지금보다 한층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부동산 통계를 유일하게 공표하는 기관으로써 국가의 부동산 정책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감정원의 정체성을 ‘부동산 통계허브’로 구축하겠다는 것이 김 원장의 구상이다. 이를 위해 더 혁신적인 전산시스템을 갖추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학벌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끌어모으라”고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원장은 업무뿐 아니라 개인 관리도 극진하기로 유명하다. 2000년 셋째 딸이 태어나자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을 느낀 그는 매일 10㎞씩 뛰어 1년에 4000㎞를 채우기도 했다. 경제신문 열혈독자이기도 하다. 김 원장은 “한국경제신문은 5년째 스크랩해 모아둔 두꺼운 파일이 있을 정도로 꼼꼼히 본다”며 “일과 후 기사를 오려 붙이는 시간이 재밌는 일이 됐다”고 말했다.
이정선/김형규 기자 leeway@hankyung.com